기사를 검색하다 우연히 프리다 칼로의 <작은 사슴>이란 그림을 보게 됐다. 여기저기 화살에 꽂힌 몸통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 그림 밖을 노려보듯 응시하는 사슴의 얼굴은 화가 자신의 얼굴이었다. 10대 때 겪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여성편력이 심한 남편 때문에 한평생 극심한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붓을 놓지 않은 화가라고 했다.
사냥꾼이 쏜 화살을 여기저기 몸에 꽂은 채 위태롭게 뛰어가는 작은 사슴. 숨을 수 있는 수풀조차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는 차라리 이곳에 뛰어들어 고통을 잊으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끌어올린 작은 사슴은 정면을 똑바로 보고 있다. ‘결코 죽지 않겠다.’ 그림을 보는 모두에게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그 시절의 내가 프리다 칼로처럼 호된 시련을 겪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비 오던 그날 길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던 나를 떠올리면 프리다 칼로 그림 속의 작은 사슴처럼 느껴진다. 걸작을 남긴 예술가가 겪은 것 같은 처절한 고통이나 누구라도 듣고 눈물 흘릴 크나큰 시련이 있었던 건 아니다. 이렇다 할 사연도 없는데 화살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이 더 서글프기도 하다.
아이들을 좀 키우고 뒤늦게 내 길을 찾겠다고 나섰지만 당연히 쉽지 않았다. 면접은 가보지 도 못하고 서류에서 연이어 탈락하면서 점차 눈높이를 낮췄다. 단기간 비정규직에도 원서를 열심히 냈다. 어떻게든 단절된 경력을 메꿀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되뇌면서.
“혹시 은수 선생님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교육청 구직난에 경력을 올려놓으신 걸 보고 연락드려요.”
“아, 네네!”
고등학교의 한 달짜리 기간제 교사였다. 따로 원서를 낸 곳은 아닌데 교육청에 등록되어 있는 내 프로필을 보고 담당 교사가 연락을 준 거였다. 자기네가 일정이 급해서 그러니 당장 다음 주부터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렇게 서류를 많이 냈어도 인사 담당자한테 연락 한번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면접도 없이 이렇게 바로 일을 하라고 제안을 받으니 들뜬 마음에 이것저것 잴 겨를도 없이 바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네, 갑자기 연락드린 건데 와주신다고 해서 감사해요. 저희가 좀 급하게 돼서 내일 오후에 오셔서 교과서랑 참고서 등 자료 받고 수업 준비해 주실 수 있겠어요?”
“아, 어쩌죠? 내일은 아이 병원에 중요한 예약이 되어 있어서요. 혹시 하루만 미뤄 주시면 안 될까요?”
“네, 그러죠. 다음 주 전까지만 오시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마음은 당장 달려가서 자료를 받고 싶었지만 대학병원에 오래전부터 예약되어 온 아이 진료가 걸렸다. 아직 날짜가 여유 있으니 상관없다는 담당 교사의 말에 안심하며 약속 날짜를 하루 뒤로 잡았다.
한 달 일거리지만 기뻤다. 녹슨 경력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인정해주는 곳이 있다니 안심이 됐고 프로필만 보고 나를 찾아준 거라 더 뿌듯했다. 아직 먹히는 경력이구나, 그래도 젊었을 때 일을 해둔 보람이 있구나. 이런 생각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기회가 드문 주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사실 강상중 교수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에서 나왔듯이 일자리라는 건 사회로 들어가도 된다는 입장권 같은 거다. 전업주부는 왠지 그 입장권이 없는 사람 같아서 가끔 서러웠다. 신용카드 하나 만들려고 해도 배우자와 통화해야 하고 어떤 서류를 작성할 때 직업난에 ‘주부’가 없으면 ‘무직’에 동그라미를 해야 했다. ‘무직’이라는 어감이 주는 무력함이 싫었다. 재택근무 같은 일도 조금씩 했지만 혼자 집에서 하는 일에서 사회적 인정이나 자아실현으로서 성취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육아와 살림에서 조금씩 손을 놓아도 되는 시점에 작은 일자리라도 구하려고 몸부림쳤지만 번번이 서류 탈락의 아픔만 이어졌는데 이렇게 뜻밖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연이은 탈락에 지친 마음이 생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가르칠 학년과 교과목 내용을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하고 짬을 내어 서점에 들러 교과서도 들춰봤다. 예전에 잠깐 학교에 나갔을 때 그래도 꽤 인기 많은 선생님이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 짓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 어떤 수업을 재미있다고 할까, 설거지를 하다가도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잠시 고민하는 그 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아이들에게 가는 말 한마디도 훨씬 부드러웠다. 숙제해라, 책상 치워라, 평소라면 소리치며 시키던 일도 타이르듯이 말했다. 육아서를 보고 아무리 노력해도 흉내내기도 어려웠던 ‘화내지 않는 엄마’가 참 쉽게도 됐다.
“엄마, 기분 좋은 일 있어?”
“아, 별건 아니고 엄마 당분간 일하게 됐어.”
“무슨 일?”
“학교에 나갈 거야.”
“학교? 그러면 늦게 와?”
“아니야, 너 학원 끝날 때쯤이면 오니까 염려 마.”
잠깐 울상이 되던 둘째가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퇴근하고 온다는 엄마 말에 안심하는 눈치다. 아이들 크니 이제 이 정도 일은 큰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두고 일을 하려면 늘 아이 봐줄 사람을 구하느라 발을 동동 굴렀다. 여기저기 기관에 의뢰하고 이웃들에게도 물어물어 힘들게 사람을 구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못 오겠다고 하면 얼마나 눈앞이 깜깜했는지. 제발 누구라도 맡아만 줬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막상 아이를 맡기려면 믿을 만한 사람인지 걱정이 되어 밤새 고민하던 시간들. 그런 세월을 지나고 이만큼 키워 놓으니 일을 하기가 수월해졌음이 실감 났다.
이튿날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그릇을 치우고 있는데 담당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 선생님 안 그래도 전화드리려고 했어요. 오늘 뵙기로 했죠? 이따가 가겠습니다.”
“어, 그런데 선생님 죄송한데요.”
“네?”
“저희가 사실 선생님께 연락드린 그제 오전에 학교 홈페이지에도 형식적이긴 하지만 구인 공고를 냈었거든요. 하지만 시일도 촉박하고 선생님 프로필 보니 적임자다 싶어서 제가 연락을 드리고 선생님으로 바로 결정한 건데요.”
“그런데요?”
“어제 뜻밖에 몇 분이 지원을 하셨어요. 교감 선생님이 보시고 어쨌거나 지원한 분들이 있으니 면접을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시네요.”
“아, 저 구두로 정해진 것도 효력이 있는 것 아닌가요? 교감 선생님께서도 승인한 사항인 줄 알았는데요?”
“맞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그제만 해도 선생님이 오시면 되겠다고 하시더니 어제 지원자들이 있는 걸 보고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것 같아요.”
“아…….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죄송하지만 선생님도 이력서를 준비하시고 오늘 면접을 보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어이없다고 생각했지만 면접은 11시.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이력서를 부리나케 출력하고 옷장을 한바탕 뒤져 허겁지겁 옷을 입고 현관을 나섰다. 구두계약도 계약인데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밉보이면 될 일도 안 될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고 급한 대로 스마트폰으로 면접 예상 질문을 검색했다.
제법 먼 거리에 있는 학교라 중간에 버스도 갈아타야 했다. 아침에 나설 때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그새 어두침침해져 환승 정류장에 내렸을 때는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못 살아! 하필이면! 비 맞은 생쥐 꼴로 면접장에 들어가게 생겼네!”
있는 대로 초조해져 누가 듣거나 말거나 혼잣말을 내뱉었다. 급한 대로 슈퍼에서 우산을 사려고 뛰어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 진짜! 바빠 죽겠는데! 여보세요!”
“선생님, 00 고등학교인데요.”
“아, 네네! 지금 가는 길이에요. 갑자기 비가 와서!”
“선생님, 아, 어떡하죠? 너무 죄송한데요. 안 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사실 공고에 서류 마감이 어제 오후 4시였거든요. 교감 선생님이 원칙대로라면 선생님은 서류를 접수하지 않으셨으니 면접 자격이 없다고 하시네요.”
“아니, 선생님, 공고는 형식적인 거고 저를 뽑으시는 거 아니었어요? 원래 어제 참고서도 받아가라고 하셨잖아요?”
“맞아요, 공고는 형식적인 거였는데 교감 선생님이 갑자기 이렇게 말을 바꾸셔서 저도 참 난처하고 선생님께 죄송합니다.”
걷다 보니 슈퍼 앞에 도착했지만 우산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참고서 받으러 오라고 했을 때 바로 가서 챙기고 교감 선생님한테도 인사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아이 병원 진료를 미루지 않은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제 발로 경력을 단절시키고 결혼한 나의 무지가 이런 모욕을 당하게 한 걸까? 아이들 낳고 정신없이 키우다 나이만 먹은 잘못인가?
힐끗힐끗 쳐다보는 행인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발밑에 생기는 웅덩이를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를 피하지도 않고 눈물도 닦지 않은 채. 한 달 뿐인 기간제 교사를 못하게 된 게 뭐 그리 서러운 일이었을까.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한 마음에 그래도 작은 구멍 하나가 환기구처럼 뚫렸던 거다. 그 환기구로 들어오는 새 바람에 들뜨고 설렜는데 억센 손 하나가 그 보잘것없는 구멍마저 막았다.
빗속에 오가는 차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 유리창 안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사람들. 나에게서 프리다 칼로 그림 속 작은 사슴의 눈빛을 보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