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보이스피싱 당하나요?

by 은수


체호프의 단편 <자고 싶다>에는 아기를 돌보느라 잠을 못 자는 소녀 바리까 이야기가 나온다. 읽는데 정말 체호프가 혹시 아기를 밤새 돌본 적이 있나 궁금해졌다. 어쩌면 이렇게 아기 돌보며 잠 못 자는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그건 졸음을 참는 수험생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책상에 앉아서 내려앉는 눈꺼풀을 치켜뜨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3-4킬로그램의 생명체를 업고서, 운이 좋으면 앉고, 더한 경우 서서 밤을 새우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큰아이가 100일도 안 됐을 때다. 품에서 보채다 겨우 잠든 아기를 깨우지 않으려고 손가락 마디마디 힘을 주면서 가만가만 침대에 눕혔지만 아기는 이불의 바스락 소리에도 움찔 놀라며 깼고 울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아기 띠도 거부하는 아기를 품에 안고서 왔다 갔다 계속 움직여야 했다.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면 세상 떠나갈 듯 우는 아기 때문에 불도 못 켠 어두운 거실에서 아기를 안고 끝없는 행군을 해야 했다.

앞으로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한없이 도는 행군을. 새벽 4시쯤 됐을까. 아기를 안고 졸면서 걷다가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는데 하마터면 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잠깐의 안도감 뒤에 왜 그리 서러움이 밀려들던지. 어둠 속의 행군을 하는데 눈물이 흘렀다. 아기가 깰까 소리도 못 내고 숨죽여 울었다.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눈물의 행군을 했다.




하룻밤은 그렇게 길었다. 그때는 시간이 느리게만 간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10년이 훌쩍 흘러 있었다. 하룻밤의 결은 그토록 촘촘했는데 10년은 이렇게 성기게 갈 수 있는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언제까지나 품 안에서 보챌 것 같던 아기가 ‘이제 내가 엄마보다 좀 큰데?’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몰래 수많은 일출과 일몰이 빨리 감기를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하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은 크고, 나는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세월이 흘렀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나 분명히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눈 떠보니까 마흔이 넘었어요. 이거 어떻게 해요? 바보도 아니고 왜 나이 든 걸 이해할 수가 없죠? 내 머릿속에 시간을 인지하는 어떤 회로가 고장 났나 봐요. 누가 내 시간을 몽땅 훔쳐간 거 같고, 무슨 시간 보이스피싱 당한 것 같아 억울하기까지 해요.”

나보다 몇 년 위인 이웃 언니에게 하소연했다. 언니는 이미 겪은 걸까? 그저 웃으며 듣고만 있다 불쑥 한 마디를 내뱉는다.

“자기도 왔나 보구나.”

“뭐가요?”

“내 주변에 많이들 그래. 얼마 전에도 자기 또래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더라고. 혼자 기차를 타고 지방에 내려갔다 오고 미친 듯이 아무 산이나 오르락내리락하고. 집에 있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면서 동서남북을 다 누비고 다니더라고.”

“아, 나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분 만나고 싶을 지경이에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네요.”

“거기도 자기랑 비슷해. 이제 둘째까지 좀 커서, 시간이 나기 시작했어.”

“시간이요?”

“그래, 생각해 봐. 자기가 힘들다고 얘기한 게 둘째가 혼자 학교는 물론 학원까지 다니게 되면서부터야. 애들 좀 키우고 한숨 돌리게 되면서 자기처럼 힘들어하는 엄마들 많아.”

‘애들 좀 키우고 한숨 돌리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것저것 배우고 기회가 되면 일도 다시 할 거라고 야무진 계획도 세우지 않았던가. 이력서를 내려고 사진도 먼 곳까지 가서 찍었었다. 동네 사진관도 있었지만 인터넷에 ‘증명사진 잘 찍는 곳’을 검색해서 일부러 찾아갔다. 미용실에 들러 머리 손질도 하고 상반신만이라도 단정하게 나오도록 옷장을 뒤졌다. ‘출근룩’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옷장을 신경질적으로 열었다 닫았다 몇 번을 거듭한 끝에 제법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는 블라우스와 재킷을 찾아냈다. 옷장에서 혼자 시간을 견딘 유행 지난 옷일지언정 사진에는 괜찮아 보였다.

구직 사이트를 검색하고 각종 일자리 게시판을 뒤져 간신히 내게 맞는 구인 정보를 찾아냈다. 하루를 꼬박 공들여 이력서를 작성했다. 제대로 된 직장 경력은 오래전이었고 결혼한 뒤로는 듬성듬성 빈자리 많은 비정규직 경력뿐이었지만 원하는 인재상이 내 능력이나 경험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됐다. 사진을 스캔해서 이력서에 올리고 ‘보내기’를 클릭하는 순간 이미 상쾌한 출근길을 상상하며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궁금한 마음을 못 참고 전화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0월 0일에 이력서 낸 사람인데요.”

“네, 검토했습니다.”

“혹시 결과가 나왔나요? 이미 뽑은 건가요?”

“아……. 아직 채용은 하지 않았고 심사 중인데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희는 젊은 사람을 원해서요.”

무슨 말인가 잠깐 생각해야 했다. 채용 공고에 나이를 명시했거나 확실하게 신입을 뽑는 내용이었으면 응시도 하지 않았을 거다. 나이에 대해 아무런 공지도 없었는데 갑자기 ‘젊은 사람’을 뽑고 싶어 하는 인사 담당자에게 뭔가 따져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형용사의 두루뭉술함이 숫자의 서늘함보다 더 잔인한 순간이었다. ‘30세 이하’를 원한다고 말했으면 ‘나는 30세 이하가 아니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면 됐다. ‘젊은 사람’을 원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늙은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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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키운 세월은 눈부셨다. 팔뚝만 한 아기였는데 어느새 걷고 숨 쉬고 말하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녀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너그러운 세월에 깜빡 속아 내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줄 알았나 보다. 젊은 사람 대열에서 서서히 비켜나는 줄도 모른 채 가족을 위한 그림자 노동에 온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놀이터에서 기다린 시간, 반찬거리를 사느라 장보는 시간, 아픈 아이에게 시간 맞춰 해열제를 먹이려고 졸린 눈을 치켜뜨며 기다린 시간, 내 시간은 늘 조각나 있었고 그래서 흘려보낸 시간의 양이 피부로 다가오지 않았다.

‘늙은 사람’으로 취급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내가 놓친 시간이 가늠되었다. 토막 난 시간이 아니라 한꺼번에 쓸려 내려간 세월이었다. 시댁 뒷산에 허리춤까지 오던 벚나무가 있었다. 듬성듬성 꽃이 앉은 가지가 허전해 보였는데 아이들을 키운 10여 년 사이, 바람 새 나갈 틈도 없이 촘촘한 벚꽃을 가지마다 피우며 원두막에 그늘을 드리울 만큼 큰 나무로 변했다. 자연에는 위대한 세월이 나에게는 가혹했다. 깜깜한 거실에서 제자리 행군만 하며 시간을 가늠하지 못하고 있던 나를 늙은 사람의 자리에 갖다 놓았다.




세월이 갖다 놓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 봤다. 그 자리에서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에 얹혀사는 나의 시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우주적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찰나에 불과한 내 인생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붙잡아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깊어졌다. 지나간 10년을 돌아보고 우물쭈물하는 새 다가올 10년, 20년, 혹은 30년 뒤에 또 같은 회한에 젖을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세월이 아무 자리에나 나를 갖다 놓기 전에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아직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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