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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나는 기간제 교사였다

by 은수

그녀와 나는 B고등학교 기간제 교사였다. 그 학교에서 벌써 3년째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다는 그녀는 동그란 눈에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모든 게 바뀐 낯선 환경. 편안하게 환대해 주는 그녀를 보며 내심 동료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자체도 인생의 큰 변곡점인데 난 결혼과 동시에 지방으로 내려왔고 직장도 바뀌었다. 그것도 공공기관의 정규직에서 고등학교의 기간제 교사로. 아침마다 식탁에 마주하는 사람이 바뀐 데 적응하는 것만으로 심리적 에너지 소모가 큰데 사는 지역도 달라지고 직장이, 그것도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바뀐 일상에 익숙해지는 건 쉽지 않았다.


교무실에 나 같은 기간제 교사가 몇 분 있었지만 남선생님이고 연령대도 달라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교생 실습이 전부인 학교 경력으로 갑자기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며 각종 학교 업무를 해내느라 내 안의 능력과 에너지를 바닥까지 긁어서 쓰는 기분이 드는데 더 힘든 건 차별이었다. 노트북이 낡고 속도도 느려서 교사들 노트북을 전부 교체하는데 기간제 교사들만 예전 것을 그대로 쓰라고 한다거나, 방학이어도 기간제 교사는 나와야 한다는 교장 선생님 말씀 때문에 아이들도 없는 학교에 나와 우두커니 자리를 지켜야 하는 등의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같은 설움을 당하는 처지여서일까. 그녀와 나는 이내 단짝처럼 붙어 다니며 친해졌다. 나보다 학교 업무에 능숙한 그녀에게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싫은 내색 안 하고 흔쾌히 알려줬다. 심지어 그녀는 말도 듣기 좋은 말만 했다.


“선생님, 서울에서 파마하고 온 거예요? 와, 역시 서울 스타일은 다르네!”

“선생님, 애들이 저보다 선생님이 나이 많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요. 게다가 선생님이 더 예쁘대요.”

“선생님 남편 사진이에요? 되게 훤칠하고 준수하시다! 예쁜 신혼집에 잘 생기고 똑똑한 남편에! 선생님은 다 가졌네.”



그녀가 띄우는 말에 난 늘 여유로운 미소로 겸손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실험실에서 거의 밤 12시에나 들어오는 남편 대신 그녀와 저녁도 종종 같이 먹고 기간제 교사의 애환도 나눴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타지에 뚝 떨어져 외롭게 지낼 뻔했는데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녀는 나와 달리 요리에도 제법 솜씨가 있어서 자취하면서도 맛있는 걸 만들어 먹었다. 가끔 그녀가 손수 만들어서 싸오는 간식을 얻어먹는 게 미안해서 큰 마음먹고 김밥을 쌌다.


아침에는 출근 준비를 하느라 바쁠 거란 생각에 전날 저녁에 미리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뒀다. 아무리 결혼하기 전에 김치찌개 한번 안 끓여봤다고 해도 참 놀랍게 무식했다. 냉장고에서 밤새 자리를 지킨 딱딱하고 차가워진 김밥을 교무실에 들고 가 선생님들께 드시라고 돌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선생님들은 뭐라 안 하시고 그저 웃으며 드셨다. 그녀는 ‘선생님, 딱딱한 김밥은 처음이네요’라며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한 입 베물더니 더 먹지 않았다.


며칠 후 그녀가 냄새부터 향긋한 김밥을 싸왔다. 깻잎을 정성스럽게 속에 한 장 한 장 끼운 김밥은 내가 가져온 말도 안 되는 김밥 하곤 비교 불가였다. 난 그녀의 음식 솜씨를 치켜세우며 다른 선생님들이 남긴 것까지 알뜰하게 싹싹 먹었다. 집에서 내가 만든 맛없는 음식만 먹다가 엄마가 막 만들어준 것 같은 김밥을 먹으니 꿀맛이었다.



그렇게 1년이 훌쩍 지나고 계약 기간이 끝나서 그녀와는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한다 어쩐다 하면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 와중에 임신한 나는 입덧으로 괴로워하느라 몇 번째일지 모르는 그녀의 임용고시 도전에 힘내라는 문자 한번 보내주지 못했다. 첫애를 낳고 얼마 뒤 그녀가 임용고시에 합격했다며 전화를 했다.


“와, 선생님, 정말 축하해요.”

“고마워요, 언제 아기 보러 놀러 갈게요.”

“네, 이제 공부 끝나서 시간도 많아질 텐데 연애도 하고 재미있게 지내셔야죠.”

“선생님, 말만 그렇게 하지 마시고 소개팅 주선 좀 해주세요! 선생님 주변에 괜찮은 사람 많잖아요!”


뜻밖의 말에 조금 당황했지만 알겠노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빈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아 자꾸 마음에 걸렸다. 중매는 잘못하면 뺨 맞는다고 하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알아본다고 한 이상 약속을 지켜야 했다. 얼마 전 근처 연구소에 취직한 남동생에게 물어보니 마침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소개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소개팅 주선 이후에는 연락이 없었다. 물어볼까 하다가 공연히 부담을 주는 것 같았고 나도 아이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 그녀 일은 잊어버렸다. 몇 달이 지났을까. 어느 날 남동생이 아기 본다고 놀러 와서 같이 저녁을 먹다가 불쑥 물었다.


“아, 그런데 누나 알지?”

“뭘?”

“저번에 소개팅 한 그 두 사람 결혼해.”

“뭐?”


당황스러웠다. 적어도 주선자에게는 연락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어떻게 결혼한다는 소식도 안 전할 수가 있을까? 동생은 바빴나 보지, 무심히 말하고 갔다. 아기를 재우고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섰지만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소파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그래도 한때 그렇게 친했는데. 우리가 걷던 그 여름밤 골목길, 여고생들처럼 수다를 떨며 웃고 즐거워했던 시간들. 그런 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걸까? 혹여 주선자에게 어떤 사례를 하는 게 아까워서였을까? 내가 뭘 요구할 사람도 아닌데, 하다못해 마음을 담은 손수건 한 장이면 될 것을 그게 아까워서 연락도 안 한 걸까?


안 좋은 기억만 있는 관계는 오히려 잊기 쉽다. 그냥 미워하고 잊어버리면 된다. 좋은 기억을 심어준 사람이 준 상처는 더 곱씹게 된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가장 나쁜 결론을 낸다.

날 무시해서야. 자기는 임용고시 붙고 선생님이 됐는데 임용고시 떨어지고 집에서 애만 보는 내가 우스운 거야. 안 그래도 아기를 돌보느라 사람도 못 만나고 우울한데 한때나마 우정을 나눴다고 한 상대한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니 서러웠다.



두어 달 뒤 집으로 청첩장이 왔다. ‘선생님, 결혼 준비로 바빠서 연락도 못 했어요. 와주시면 감사하겠어요’라는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금빛 문양이 점점이 박힌 청첩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무시를 당하고 내가 가야 할까?


그녀와의 일을 떠올리다 문득 그녀가 싸왔던, 알싸한 깻잎 향기가 어린 김밥이 떠올랐다. 아이 낳고 살림을 좀 해보니 냉장고에 있는 김밥을 먹으라고 준 게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나의 돌덩이 김밥을 먹고 굳이 하루 이틀 뒤에 정갈한 깻잎 김밥을 싸 온 그녀의 마음은 그저 순수하게 나에게 엄마표 김밥을 먹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녀는 나에게 좀더 복잡한 감정을 지녔을지 모른다.


앞에서는 ‘선생님은 다 가졌네요’라고 스스럼없이 웃었지만 사실 그때 그녀는 힘들고 외로운 처지였다. 고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스스로 벌어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그녀는 하루하루 산다기보다 버티는 기분이 들었을 거다. 일이 절실한 건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였지만 상대적으로 난 매달 월급이 그녀만큼 절박하지 않았다. 내가 소꿉장난 같은 신혼살림을 하며 여고생 시절로 돌아간 듯 그녀를 또 한명의 친구로 여기며 즐거워할 동안 그녀는 자신의 상황과 여러모로 다른 내가 불편했을 수 있다.


어쩌면 그녀가 깻잎 김밥을 싸 왔을 때 나는 적잖이 내 김밥과 비교하며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이 맛있게 먹기에 바빴다. 맛난 집밥에 굶주린 탓도 있지만 애초에 그녀를 나의 어떤 경쟁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니꼬웠을지 몰라.’


가끔 그녀가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볼 때가 있었다. 한가하게 신혼 놀이, 직장 놀이를 즐기는 것 같은 나를 보며-사실 그때 나도 그녀 못지 않게 벼랑 끝에 선 것처럼 힘들었는데-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봤자 서른 전후. 세상 경험이 부족한 그녀도 자신에게 닥쳐온 불가해한 어떤 감정들을 처리하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나에게 야멸찬 행동을 하며 은근한 분풀이를 한 걸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한겨울에 신부가 되었고 나는 추운 겨울날 아기까지 데리고 꽤 멀리 있는 결혼식장을 찾아가 기꺼이 축하해 줬다. 서로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도 그녀를 떠올리면 조금 씁쓸해지긴 하지만 저대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이해도 된다. 어쩌면 내가 넘겨짚은, 그녀 마음속 풍경은 완전히 틀렸을 수 있다. 그래도 누군가를 덮어놓고 미워하기보다는 오해일지언정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멈추고 싶지는 않다.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필립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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