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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겐 판타지 영화 <82년생 김지영>

by 은수

책을 읽을 때는 꽤 공감하며 읽었는데 영화에는 감정 이입이 잘 안 되더군요. 주인공이 국문과를 나와서 홍보팀에서 근무하다 퇴사하고, 일을 다시 갖고 싶어 방황하는 과정이 저랑 너무 똑같아서 놀라긴 했어요. 저 또한 국문과, 홍보실, 결혼과 출산, 경력 단절, 방황의 수순을 밟았으니까요. 그거 빼곤 다 달랐습니다.(스포라고 여겨질 부분 있으니 영화를 보실 생각이라면 읽지 말아주세요)




'내가 목욕시키려고 일찍 퇴근했는데'라고 말하여 오자마자 외투 벗는 남편 없습니다


적어도 7080 세대에서는 잘 못 봤네요. 아이 어릴 때, 엄마는 손에 익지 않은 육아와 살림으로 정신없지만 남편 또한 회사에서 아직 연차가 낮아서 윗사람 눈치 보랴, 업무 익히랴 숨 가쁜 하루를 보냅니다.

직장 다니고 공부만 했던 제가 갑자기 24시간 아기 울음소리에 대기 상태로 살면서, 느려 터진 손으로 살림을 하니 몸은 고달픈데 마음 한쪽은 텅 비어갔습니다. 퇴근한 남편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나도 힘들어'였어요. 공유처럼 오자마자 외투 벗고 아이 씻기는 모습은 잘 못 봤네요. 그래도 연애할 때는 꽤 다정했고 입사하기 전, 학생 신분일 때는 아기 돌보는 데 무척 협조적이었던 남편이 회사를 다니면서 점점 퉁명스럽게 변해갔어요. 자기도 힘들었던 거죠. 아빠도, 엄마도 초보 엄마, 초보 직장인 노릇하느라 힘든 시절, 영화에서처럼 서로를 저토록 세련되게 배려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현실은 훨씬 잔혹해서 영화가 미화했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참 많이 싸우고 울고불고했네요. 지금은 때때로 잉꼬부부입니다만:)


'우리가 그간 지영이한테 너무 무심했나 봐'라고 반성하는 시누이 없습니다


며느리가 아프면 시댁 식구들 반응은 '자기 몸 관리 어떻게 했길래'입니다. 심지어 제가 아는 분은 아픈 시아버지를 6개월간 집에서 간병을 하다가 본인에게 갑상선암이 왔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며느리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젊은 사람이 몸 관리 하나 못 해서 어쩐대'라고 비수를 꽂았다고 하더군요.

더구나 며느리가 우울증 같은 정신과적 질병을 앓는다면요? '요즘 사람들 다 한 번씩 우울증 걸리곤 해'라거나 '산후 우울증이 무섭다는데 얼른 병원 가봐라'라고 걱정해 주는 시댁 식구들은 제 주변에선 못 봤네요. 원래 이상했던 애가 시집와서 괜히 우리 아들 고생시킨다고 억울해 하는 분들이, 안타깝지만 더 많았습니다.



'아들만 자식이냐'라고 남편에게 소리지르며 편들어주는 친정 엄마 없습니다


제일 판타지라고 느낀 부분입니다. 우리 윗세대 어머니들 고생도 많이 하시고 고마운 분들입니다. 하지만 뿌리 깊은 아들 선호는 어쩌지 못하시는지 병시중은 딸들에게 받으면서 아들만 편애하는 친정 엄마들 아직도 많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경우도 서운하지만 같은 여자 입장이라 조금 다를 줄 알았던 친정 엄마마저 그런 모습 보일 때면 사실 딸들은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아니, 아기마저 순한데요?


유모차를 저렇게 순순히 타는 아기, 쉽게 울음 뚝 그치는 아기, 앉아서 밥 먹는 아기....하....이거 동화 맞습니다. 저런 아기 흔치 않아요.

아기들은 왜 그리 유모차를 싫어할까요? 하필 아기띠도 안 가져왔는데, 비는 오는데, 아기는 유모차 안 타겠다고 숨 꼴딱 넘어가게 울고불고...한 손에 아기 안고 한 손으로 유모차 밀고 목을 꺾어 우산 받쳐 들고 집에 오다 울 뻔했습니다. 요령 없고 경험 없는 초보 엄마라 당한 난처한 상황이지만 육아란 그런 것이더군요. 아기가 둘이 되면요? 하하...상상에 맡깁니다.




구질구질하고 험난한 터널을 지나온 엄마들이 봤을 때 영화는 판타지였습니다. 영화가 현실을 똑같이 반영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 보고 맘껏 공감하리라'라고 갔던 엄마들마저 설득하지 못하면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설정하는 걸 경계하다가, 행인 1,2,3보다는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주는 상처에 멍드는 보통의 엄마 마음을 담아내는 데는 오히려 소홀했던 거 아닌가 싶습니다.(그 관계는 가부장제에 얽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가부장제라는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기를 주저한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공유와 정유미를 비롯한 연기자들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재미없거나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한번 눈물도 흘렸지만, 기왕에 결혼, 출산, 경력단절의 와중에 여성이 직면하는 혼란과 아픔을 영화로 담고 싶었다면 관객에게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연출을 더 많이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두서없이 몇 자 감상평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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