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수업을 들어가기 전, 커피를 사려고 줄을 서 있는데 누가 조심스레 말을 건다. 찬찬히 보니 지난 시간에 만났던 글쓰기 수강생이다. 수업을 한 번밖에 하지 않아 강사와 수강생 사이가 아직 서먹할 수 있는데 J 씨는 기꺼이 먼저 말을 건넸다.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자 머뭇거리며 돌아서는 그녀. 여러 수강생들 사이에서 얌전하고 말이 없어 처음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목소리도 가늘고 말투도 조용조용해서 언뜻 보면 소극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수업을 거치며 지켜본 그녀는 의외였다. 시종 진지한 눈빛으로 수업에 집중하며 자신이 쓴 글을 먼저 손 들고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아이들을 유치원이든, 학교에든 서둘러 보내고 모이는 엄마 수강생들의 열기는 언제나 뜨겁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공간의 소중함을 그녀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실 안의 정적을 가르고 여러 사람 앞에서 내 글을 낭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J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작은 목소리지만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글 속에서, 단정하고 차분한 겉모습과 달리 '경력단절녀'로서 현재 진행 중인 고민과 갈등으로 출렁이는 그녀의 속마음이 드러났다. 수업이 끝나던 날, "평생 들을 칭찬을 선생님한테 다 들은 것 같아요."라며 수줍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처음보다 밝아 보였다.
종강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인근에 A 대형 서점이 오픈하게 됐는데, 출판사 관계자가 나에게 서점에서 일할 사람을 급히 추천해 달라고 했다. 판매뿐 아니라 북 큐레이션도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는데, 적당한 사람을 못 구해 애를 먹고 있다면서.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 글쓰기 수강생들 중 다독가도 많고 관련학과를 나온 사람도 있기에 추천은 어렵지 않았지만, 출퇴근 시간이나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다. '막내가 아직 어려서요', '퇴근이 조금 더 빠르면 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워요' 등 안타까운 사연을 듣자니 내가 다 애가 탔다. 근무 조건이나 환경도 나쁘지 않았고 언젠가 독립서점 오픈을 꿈꾸는 이라면 일을 배울 기회인데 말이다. 희미해져 가는 자기 삶의 자리를 찾고 싶은 열망을 글 속에 쏟아냈던 엄마들이지만, 막상 일자리가 눈앞에 있어도 선뜻 잡지 못하는 현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는 걸까.
그냥 적당한 사람이 없다고 전화하려다가, 사서 경험이 있다며 일하고 싶은 마음을 얼핏 드러낸 J 씨가 떠올랐다. 혹시나 싶어 연락을 해 봤다.
"아, 선생님, 사실 저 하고 싶은데 말을 못 하고 있었어요. 관련 경력이 그다지 많지 않고, 직장에 다니긴 했지만 이런 업무와 직접 연관된 일을 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나마도 경력이 끊긴 지가 오래되어 용기가 좀 안 나요."
"J님, 제가 보기엔 잘하실 것 같아요. 예전에 공동문집 배포 행사 때 보니까 조용한 듯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일하시더라고요. 그때 보니 모르는 사람 붙잡고 말씀도 잘 하시던데요? 전공도 그렇고 책에 대한 조예도 그렇고, 일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제가 보기엔 적임자입니다. 자신감만 가지면 잘하실 수 있어요."
"정말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J 씨는 급하게 잡힌 면접 일정을 잘 소화해 내고 다행히 합격해 바로 일을 시작했다. 서점 오픈 행사를 준비하는 그녀를 보러 갔다. 말이 좋아 북 큐레이터지, 신생 서점에선 너나 할 것 없이 책을 나르고 꽂고 정리해야 했다. 어수선한 현장을 보니, 가녀린 그녀가 하기에 다소 버거운 일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됐다.
"아, 선생님! 오셨어요?"
책을 정리하던 J 씨가 나를 보자 상기된 얼굴로 반갑게 인사했다. 늘 가지런했던 머리가 다소 헝클어진 채 무거운 책을 가득 들고 있었지만, 표정은 외려 한 짐 내려놓은 사람처럼 활기차 보였다. 씩씩하게 일하는 모습에 안도했다. 서점은 무사히 오픈했고 그녀도 그럭저럭 잘 적응한 것 같기에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며칠 전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아, 잘 지내세요? 코로나 때문에 서점이 당분간 휴점 한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아무래도 유동인구가 너무 많은 건물이다 보니 건물 전체를 다 폐쇄한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래서 서점이 한 달 넘게 휴점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감원을 해야 한대요. 앞으로 경영도 불투명해지고 해서요."
"네? 감원요?"
"네, 신생 서점이라 아무래도 타격이 큰가 봐요. 그래서 저 그만두게 되었어요."
"아, 어떡해요."
책 더미 속에서도 해맑게 웃던 그녀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공연한 일을 벌인 것 같아 미안했다.
"괜찮아요. 일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그래도 내가 마음이 너무 안 좋네요. 미안하고."
"선생님이 뭐가 미안하세요? 저한테 기회를 주셨잖아요. 사실 저 용기가 안 났는데 이렇게 다시 일해보니 사회로 나갈 자신감이 좀 생기더라고요. 계속 더 일을 배우고 실력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고요. 그래서 B서점에서 낸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을 했거든요."
"오, 그래요?"
"오늘 연락받았어요.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요. 선생님한테 제일 먼저 알려드리는 거예요."
이런 깜짝 선물이 있나. 모처럼 다시 사회로 내디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추는 줄 알았는데 J 씨는 스스로 두 번째 기회를 잡았다. 처음에 망설이며 이끌려 나온 그녀가 이제 스스로, 자기 힘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정희진 작가는 공적인 영역에서 30대 중반 이후의 여성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대부분 그 시기를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내거나 타의로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는 것이다. 교사나 공무원 등 육아휴직이 잘 보장되는 일부의 직업군에서도 여성이 가정과 일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 보통의 기업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가정이란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가치 없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버티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받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려는 엄마들의 발걸음에도 힘이 실렸으면 좋겠다. 사회적인 지원이나 가족들의 협조도 물론 필요하지만 '집에만 있던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지레 위축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엄마들이 집에 정물화처럼 머물러 있던 건 아니다. 헌신과 희생 없이는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돌보며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느라 몸부림쳤고(모성애가 어디 저절로 주어지던가), 남편, 시댁, 이웃, 주변 학부모 등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을 헤치며 사회생활 못지 않게 힘든 가정 안팎의 대소사를 꾸려 왔다. 집에 있으면서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정면으로 응시했고, 갈등하고 좌절도 했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 채워야 하는 밑바닥 자존감을 다지며 사회로 나가려는 의지를 젊은 시절보다 더 가슴 뛰게 느꼈다. 간절함을 배운 시간이다. 직무나 기술 이상의 것을 체득한 세월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해진 J 씨가 엄마로서 시작하는 두 번째 사회생활. 솔직한 글로 낯선 교실 한가운데 작은 파동을 일으켰던 그녀가 이제 사회로 나가 어떤 울림을 전할지 벌써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