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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 코 예쁘거든요!

by 은수

코로나19의 기세가 심상치 않던 즈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확진자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조심하긴 했지만 행사나 수업이 취소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방학이라 집에 있으니 수업을 가려면 아침이 분주했다. 글쓰기 수업이 있던 그날도 서점에 빠듯하게 도착해, 급히 주차를 하고 양손에 책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지하 주차장 문을 통과하려는 순간이었다.


"꽝!"


분명히 아무것도 없이 문턱만 있던 곳이었는데 유리문이 새로 생겼다. 막 설치했는지 유리가 완전히 투명한 데다 늘 드나들던 곳이라 방심하고 걷다가 부딪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얼떨떨했다. 유리문에 부딪힌 걸 인지할 때쯤이야 코가 엄청나게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거울을 보니 작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코가 부어 있었다. 아픈 건 둘째치고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지 걱정이 앞섰다. 급한 대로 피를 닦고 서점 안내 데스크에서 받은 반창고를 붙였다. 수업자료를 미리 훑어보지만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코가 퉁퉁 부어 반창고를 붙인 모습을 보고 수강생들은 의아한 눈길로 강의실에 들어왔지만, 누구도 선뜻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는다.


코를 다치고나서야 우리 얼굴에서 코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수강생들이 속속 자리에 앉는 걸 곁눈질로 보면서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니 세상에, 범죄자가 따로 없다. 부어있는 코에 비스듬히 얹혀있는 핏물 어린 반창고. 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 사노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읽고, 우리 삶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수강생들이 내 얼굴을 보는 게 부담스럽고 눈 마주치기도 민망하니 난감했다.


고골의 <코>가 떠올랐다. 얼굴에서 코가 달아나 애를 먹는 하급관료 꼬발료프의 이야기다. 코가 달아나지 않고 제자리에 있을지언정, 상처 입은 코가 얼마나 단박에 사람들 눈에 띄는지 실감하는 것만으로 꼬발료프의 황망한 마음이 잠시 짐작된다.


"아, 제 얼굴에 갑자기 웬 반창고인가 싶으시죠? 지하 주차장에 유리문이 새로 생겼어요. 거기 세게 부딪혀서요. 여러분도 조심하세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건넸지만 내심 주의력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까 마음이 쓰였다. 수강생들이 걱정해주고 아마 부러진 건 아닐 거라고 위로도 해줬지만 말이다.

수업이 끝나는 대로 달려간 병원. 의사는 사진을 보며 무심히 말했다.

"조심하시지. 코뼈 부러졌어요."

"네? 뛰어간 것도 아니고 걷다가 부딪힌 건데요?"

"전혀 예상 못하고 걷다 부딪힌 건 방어가 안 돼 생각보다 충격이 커요. 그런데 이 정도 갖고 수술하기도 애매하네요. 부러지긴 했지만 어긋난 상태가 영 점 몇 미리? 그냥 자연적으로 붙게 놔두세요."

"아, 혹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요? 코 변형이 오거나 비염이 심해지는 후유증이 올 수 있다던데요?"

"만에 하나지만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수술은 별로 의미가 없어요."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집에 와서는 계속 거울만 들여다봤다. 얼굴이 어딘지 이상하게 변한 것 같다. 아이들을 붙잡고 '엄마 코가 점점 이상해지느냐' 30분마다 계속 물어보니 나중에는 아이들이 좀 짜증스럽게 괜찮다고 말한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괜찮냐고 물으셨다.

"어쩌다 그랬니?"

"지하 주차장에 원래 없던 유리문이 새로 생겼더라고요."

"그랬구나. 네가 급히 가다 그랬나보다. 너 보면 항상 너무 바쁘더라."

바쁜 게 잘못한 건지 모르겠으나 다분히 책망하시는 말투다. 좀 기분이 상했지만 걱정되는 마음에 그러시는 거려니 넘어갔다.

"네, 성형외과에 갔는데 다행히 수술할 필요는 없대요."

"성형외과 갔으면 코 좀 예쁘게 깎아달라고 해라. 이번 기회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 코뼈 부러져 아픈 사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 같다고 흉본다더니, 며느리 코가 높은 것도 어머니는 미워 보였나 보다.

"어머니, 저 코 지금도 예쁘거든요. 요즘들은 다 높이 못 세워 안달이잖아요."

사실 내 코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일단 난 자신감을 가질 정도의 외모는 아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젊음이 무기였던지라, 외모 때문에 취업이나 연애에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외모에 특별히 한을 품은 적은 없지만 내가 예쁘다고 자부한 적도 없는데, 이참에 성형하라는 어머니 말에 화가 나서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어머니는 내 말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계속 코가 너무 높아서 뭐라뭐라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전화를 끊고 또 한번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곰곰이 생각할수록 분했다. 아픈 사람 위로하려고 전화하신 건지, 약 올리려고 전화하신 건지, 다른 사람들에겐 이렇게 경우 없는 분이 아닌데 유독 며느리에게만 여과 없이 말씀하시는 거에 신물이 났다. 당신이 아프셨을 때, 자주 전화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가족 간에 이렇게 정이 없냐'고 나무라시던 분이다.

직장 다닐 때 악독한 상사한테 더한 말도 듣고 참아 넘겼지만 고부간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있어 더 힘들다. 직장 상사야 직장에서 나오면 그만이고, 그냥 마음에서 무시해도 되지만 시부모란 존재는 그럴 수도 없다. 속상한 마음에 지인에게 전화해 하소연하려다 멈칫했다.


'지금 나는 시어머니한테 속상한 거잖아. 왜 항상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 시어머니에게 직접 안 하고? 타인에게 해봐야 흉보는 것밖에 안 되잖아.'


학원에 간 아이를 데리러 운전석에 올라앉으며 용기를 내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무슨 일이니?"

"어머니, 아까 말씀을 못 드렸는데요. 아무리 경미해도 사람이 얼굴을 다치면 예민해지기 마련이거든요. 저도 외관상 크게 티는 안 난다지만 코뼈가 부러진 거예요. 이게 어떻게 후유증을 남길지 참 걱정돼요. 그런데 어머니가 이 기회에 코를 예쁘게 깎으라느니, 그런 말씀하시니 속상했어요."

"아이고,얘, 난 농담으로 가볍게 한 말이다."

"네, 어머니는 농담으로 하신 거죠. 하지만 다친 저는 그런 말씀이 농담으로 안 들려요. 다치고 아픈 사람은 더 민감해진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전 참 속상했습니다."


심리학 책에서 숱하게 봐 온, '나 화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니 대화를 이어가는 데 부담이 덜했다. 어머니는 '그래, 네가 많이 놀랐구나' 정도로 애매하게 말을 끝맺으시고 결국 미안하다고는 안 하셨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말을 하고나니 머리 끝까지 차오르던 분노의 계단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밤 하늘을 봤다. 상쾌했다. 상대에게 맘껏 비난을 퍼부은 것도 아니고 제대로 사과를 받은 것 또한 아니었지만,10여년 간 해보지 않은 '시어머니에게 내 속마음 말하기'를 시도한 것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질 수 있다니.


오랜 세월, 무뎌졌는지 모른다. 어머니의 타박에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게 내 일인 줄 알았다. 그 패턴에 변화를 주는 데 주저했다. 속상한 감정조차 익숙해져서 다른 시도를 해볼 생각도 못한 걸까.


어쩌면 익숙한 곳이 아니라 낯선 주차장이었으면 코를 유리문에 박는 사고는 오히려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수시로 오가던 길이기에, 익숙하기에 아무런 경계심 없이 걷다 생긴 사고였다. 덫은 낯선 길이 아니라 익숙한 길에서 걸리는 것 아닐까. 내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익숙한 방식을 고집하는 동안 내 마음이 조금씩 길들여지고 내 자존감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방식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도 두려워했는데, 막상 해보니 더 새롭고 건강한 방식이 존재할 거란 기대감이 생긴다.


부러진 코뼈는 점차 붙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 코가 다치기 전보다 오히려 더 예뻐졌다며 웃는다. 일단 그럴 거라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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