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넘기면서 종종 들어가는 온라인 카페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 카페는 40세 이상 여성만 가입하는 카페이기에 내가 제법 막내 축이었다. 갱년기 여성들의 건강 정보를 주고받자는 차원에서 출발한 카페로 아는데 시간이 지나며 허심탄회하게 그맘때 여성들의 고민과 걱정을 주고받는 장이 되었다.
질문자가 본인이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 질문을 읽는 순간 제목만 보고도 어떤 맥락에서 묻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 든 남자’도 아니고 ‘젊은 여자’도 아니고 굳이 ‘나이 든 여자’를 콕 짚고, 이어서 ‘학벌’이란 이슈를 연결하는 문장에 많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 자체가 속물적이 다거나 현대 여성상에 비춰 지나치게 수세적이 다거나 이런저런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이 나이쯤 되고 보니 이런 질문을 하기까지 그녀가 지나온 삶의 여정을 추측하는 게 먼저가 된다. 나 또한 비슷한 길을 지나왔기 때문일까.
요즘도 그렇지만 특히 ‘나이 든 여자’ 세대에서는 제 나름대로 공부 잘하고 세칭 좋은 대학 갔지만 사회적 일을 계속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나의 엄마는 어릴 때 한국 전쟁을 겪었을 정도로 연세가 많으신데 어찌 된 일인지, 내가 한참 일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엄마가 지나온 난관들이랑 너무 닮아 있어서 놀란 기억이 난다.
엄마는 공립 중학교 교사라서 그나마 다른 직종에 비해 처우가 나았지만 당시 출산 휴가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한 달도 엄마가 사비로 강사를 구해 수업 공백을 메워야 했다. 엄마는 애 셋을 낳을 때마다 한 달만에 복직해 종일 서서 수업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인데 그로부터 수십 년 세월이 흘러 내가 입사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공공기관 정규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산 후 7개월간 휴직했던 한 여직원이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며 ‘이기적’이라고 욕을 먹었다.
그때는 출산 전이라 7개월 아기라고 해 봤자 숨만 붙어 있을 뿐 얼마나 여리고 아슬아슬한 존재인지 몰랐기에 그녀가 욕먹는 걸 무심히 바라봤다. 훗날, 내가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되었다가 다시 일을 하면서 엄마 때나 있는 줄 알았던 어려움이 정도가 달라졌을 뿐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실감했다. 오래전 여직원이 욕먹는 걸 방관자처럼 지켜보기만 했던 게 뒤늦게 미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나쁜 사람 안 되려고 몸부림치다가 양쪽에서 다 욕을 먹고 매일 사표를 썼다 지웠다 하는 엄마들이 늘었다. 애들이라도 잘 키워보겠다고 과감히 직장을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직장을 떠나고 애들을 키우는 세월은, 닥쳤을 때는 기나긴데 지나고 보면 훌쩍 간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한숨 돌리게 되었을 때 문득 자신이 지나온 입시 지옥이나 취업 관문이 아득하게 떠오르면 상실감을 느낀다. 사회적인 성취를 하겠다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직장에서도 아등바등 노력했던 그 시절. 문제는 저만치 멀어져서 희미해지는 풍경을 그리워할 즈음 느끼게 되는 상실감을 상쇄해줄 만큼, 현재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육아와 살림을 위해 인생 절반을 뚝 떼어줬건만 자식이란 존재가 내가 공들인 만큼 커주는 것도 아니고 가족을 향한 돌봄노동은 흔적도 없이 휘발되어 딱히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생색내자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바깥에서 차근차근 승진의 계단을 밟으며 집에선 가장 대우, 밖에선 성공한 사회인 대우를 받는 남편에 비해 자신의 자리가 작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이 든 여자들끼리 하는 비교는 대개 자식 대학 간판이나 남편 승진, 재테크 성공으로 귀결되고 이쯤 되면 내게 학벌이 무슨 소용이 있었나 싶은 거다.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노년이 된 윗세대는 아직도 부양의 의무를 강요하고, 젊은 세대는 구시대적인 여성 취급하니 인생 참 허망하고 ‘학벌’ 따위 뭔가 회의감도 드는 거다.
그녀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가만히 가늠해 보다가 댓글을 달았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이 든 여자에게는 학벌 필요 없을지 몰라요. 돌아보면 현실적으로 여자가 그 나이까지 계속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할 여건이 된 사람도 많지 않았죠. 학벌은 필요 없을 수 있지만 나이 든 여자에게도 일은 필요해요. 이번에는 누구를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요.
가족을 위해 헌신한 시간은 부정할 필요 없어요. 어떤 성과로 나타났든, 못 나타났든, 인정 받든, 못 받든 우린 각자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성장했고 그걸로 된 거예요.
그럼 돌아보거나 후회하지 말고 다시 출발하면 되겠죠? 당장에 경제적인 이익을 실현할 순 없어도 이제 나를 위한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봉사든, 취미생활이든, 아르바이트든, 인문학 공부든 뭐든요. 처음부터 크게 시작하려 하지 말고요.
일단 증명사진 먼저 찍어 두세요. 저도 어떤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사실 주부들은 자신한테 돈 쓰기 겁나서 옷도, 머리단장도 멀리하는 분들 많잖아요. 모처럼 잘 차려입고 증명사진을 찍어두면 이 사진을 어딘가 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그게 시작이 됐다고 해요. 우리, 지금 당장 집 밖으로 움직여 봐요. 두려워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