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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사람에게 더 인정받고 싶은 심리

by 은수

신입사원 시절이 서럽지 않은 사람은 드물겠지만 나는 그 시절, 일요일 저녁이 다가오면 불 꺼진 방에서 어린아이처럼 혼자 울 정도였다. 월요일이 오는 게 두려웠다. 사무실에 한 명밖에 없는 여자 선배가 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대선배라 어렵긴 했지만, 막내 귀여워해 주는 심정으로 날 이끌어 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그 선배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아 괴롭히면서 부푼 맘으로 들어간 직장 생활은 한 달만에 악몽이 됐다.




팀장님 눈을 피해 업무 시간에 부동산, 주식, 심지어 수영과 운동 등 본인 사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존경심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직장에 가면 종일 그 사람 눈치를 봤다. 나와 업무가 직접 연관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쫓아다니며 간섭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긴 하다. 그 선배 때문에 끙끙대며 맨날 하소연하자 친구가 물었다.


"넌 그 선배를 무척 싫어하는 것 같더라."

"당연하지. 대체 존경하거나 좋아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잖아. 이유도 없이 날 괴롭히고."

"그래 보여. 그런데 싫어하면서 그 사람한테 무척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듣고 보니 그랬다. 그 선배가 나의 인사고과에 영향을 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따지고 보면 업무 라인도 달랐다. 그런데 그 사람 눈에 들려고 한편으로는 전전긍긍하며 어떻게 하면 한 마디라도 칭찬을 들을까, 고심했다.

"너는 안 그래?" 내가 물었다.

"어, 물론 날 못살게 하니 그만 좀 괴롭혔으면 하는 마음에서 신경은 쓰이겠지. 그런데 넌 그 정도가 아니라 뭐랄까, 그 사람 욕을 되게 하면서도 그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느낌이 나."


나 또한 '그만 괴롭혔으면 하는 마음'에 잘 보이고 싶은 거였을까? 외려 내 편을 만들어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는 의도였을까? 친구와 헤어져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단순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출처 unsplash

어릴 때부터 나에 대한 긍정 평가보다는 부정 평가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긍정 평가는 어딘지 진실이 아니고 부정 평가가 더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여겼다. 이런 경향은 대학 시절, 스스로 험난한 연애를 자초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다가도 상대가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순간, 이상하게 관심이 사라지고 애태웠던 감정이 식어버렸다. 나에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을 찾아 감정이 이동했다.


훗날 아이를 키우면서 심리학에서 많이 다루는 부모-자녀 애착관계를 공부했을 때 '어하는 사람한테 더 인정받고 싶은 내 마음'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격려보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 세대 부모님이 많이들 그러셨듯이, 우리 부모님도 잘한 것보다는 잘못한 것을 꾸짖는 데 익숙한 분들이셨고, 여기에 더해 두 분이 다 교사라서 이런 성향은 더 극대화되었다.


어린아이에겐 우주나 다름없을 부모. 그 부모에게 늘 부정적인 평가를 들어온 아이는 자신을 향한 칭찬보다는 비난이 더 익숙한 상태가 된다.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보다는 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부모의 모습에 더 가깝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후자의 사람을 더 신뢰한다. 연애할 때조차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안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이 더 타당하다고 느낀다. 나를 싫어하는 게 '옳다'고 여기는 거다.


자신에 대해 엄격하다거나 스스로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고 그냥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는 심리 상태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기의 발전적인 모습을 이끌어낼 수가 없다. 자신의 모자란 점에 대한 개선이나 보완도 일단 스스로를 믿는 데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자녀 애착관계에 뚜렷한 문제가 없는데 부정적인 평가에 훨씬 민감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봄이란 계절이 주는 설렘에 모처럼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나갔는데 9명이 예쁘다고 칭찬해도 1명이 '그 촌스런 꽃무늬 옷은 뭐야?'라고 묻는다면 당장 어디 가서 옷을 갈아입고 싶고, 그때부터 진흙이라도 걸친 것처럼 원피스가 거추장스럽고 무겁게 느껴지는 사람도 꽤 될 것 같다.


나의 경우는 부모-자녀 관계 중 충족되지 않은 정서적 지지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아봤지만 이런 분석이 모두에게 맞는 건 아닐 거다. 나와는 전혀 다른 배경의 삶이었는데 결과는 닮은꼴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건 현재다. 사람이 유년의 기억에 어느 정도 지배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어린 시절 세팅된 대로 살 거 아니라면, 길지 않은 인생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골몰하며 살 필요는 없다. 나를 좋아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을 자꾸 생각하고 그들을 챙기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 나를 만나는 사람이 10명이라면 그중에 3명은 나에게 별 관심 없고, 3명은 날 싫어하고 3명만 날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변수가 되는 건 나머지 1명 정도. 10명 모두를 나의 지지자로 만들려는 건 망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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