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사는 곳을 바꿔 보세요.

by 은수


비가 오는 날 저녁이었다. 원장이 잠깐 남으라고 하는 목소리에서 이미 짐작했다. 처음 이 학원에서 일을 시작할 때부터 원장이랑 계속 의견이 안 맞았다. 수업시간이나 교재를 두고 자꾸 간섭하고 변경을 요구했다. 처음 면접 볼 때에는 자기는 강사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원장이니, 걱정 말고 강의에만 전념하라고 했으면서 말이다.


아이들을 보내고 잠깐 나눈 대화에서 우린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그 달 말일로 수업을 마무리 짓고 그만두기로 했다. 공연히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한 손에 옮겨 쥐고 원장실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불러 세운다.


“참, 선생님, 아이들에게 따로 무슨 인사를 하실 필요는 없어요. 학부모한테도 마찬가지고요. 아이들은 선생님이 바뀌면 바뀐 줄 알고 궁금해하지도 않으니까.”

모니터에게 말하는 건지, 내게 말하는 건지, 원장은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학원가 생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바뀌면 바뀐 줄 안다’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바뀌면 바뀐 줄 안다’는 그 말 때문에 운전대를 잡는 순간부터 계속 내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잖아. 밤 운전도, 빗길 운전도 아직 익숙지 않은 내가 어두운 빗속을 가르며 혼잡한 도로를 빠져나오려니 신경이 곤두섰다. 그 와중에도 ‘바꾸고 싶다’는 마음속 외침은 더 간절해졌다.




경력 단절의 어려움을 딛고 다시 시작한 여러 일들. 하지만 어떤 일에도 온전히 정을 못 붙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내 진심이나 열정보다는 단기적인 실적만 중요한 상황 앞에서 답답할 때가 많았다. 주부로서 사회경험 공백기가 길었던 만큼, 예전 경력을 거들먹거리거나 ‘그래도 내가 이런 사람이었는데’라는 마음 같은 건 애당초 버리기로 작정했었지만 실제 현장에 가니 몇 푼어치 자존심마저 얼마나 더 버려야 하는 건지 아득해지는 순간도 수시로 찾아왔다.


육아와 살림에 매진했던 그간의 생활방식이 있어서인지 아이 학교생활도 내게는 삶의 만족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였다. 아이가 생기 있게 지내야 나도 마음 편하게 내 일에 집중하게 되는데 커갈수록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10여 년을 산 학군 좋다는 동네였지만 경쟁적인 분위기가 나와 아이에게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좁은 동네에서 자식 성적 갖고 우열을 나누는 분위기에 턱 올라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 비우고 탁 내려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난간에 매달린 채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혼란스럽고 힘든 마음을 지탱하는 데 정작 오래된 인연들이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긴 세월을 보낸 동네였기에 인연은 늘었지만 친밀함이나 편안함까지 항상 같이 느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이 쌓일 때도 있었다. 지난 시간을 돌이키며 바쁘게 빗물을 닦는 와이퍼를 초점 없는 눈으로 보던 그때였다. 라디오에서 거짓말 같은 내레이션이 나왔다.


“삶을 바꾸고 싶다면 이 세 가지를 바꾸라고 합니다.”

빗속에서 크랙션을 빵빵거리는 차들의 소음이 커졌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사되는 바닥 빗물 때문에 앞도 안 보이고 차들의 소음에 정신이 없는 중에도 아나운서가 뭐라고 하나 궁금했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앞의 두 가지는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잘 들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아나운서가 세 번째를 말하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셋째, 사는 곳을 바꿔 보세요.”

막히는 구간을 간신히 빠져나와 뻥 뚫린 도로를 달리는데 계속 그 말이 맴돌았다. 사는 곳을 바꿔 보세요. 사는 곳을 바꿔 보세요.


그러고 보니 동네 한가운데 자리 잡은 대형 상가 건물이 어느 날부터 괜히 보기 싫었다. 늘 똑같은 간판, 똑같은 사람, 똑같은 풍경. 오래된 대단지 아파트라 편의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어서 편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그 탄탄한 편의시설이 꿈쩍도 안 하고 항상 같은 모양새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답답했다. 생기 없는 동네가 권태롭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은 막연하게나마 종종 했었다. 마침 옆에 대규모 신도시가 지어지고 있었는데 구경삼아 모델하우스라도 보고 온 날이면 공연히 들뜬 기분에 이사를 꿈꾸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에 여기저기 공사 차량이 다니는 걸 보니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는 역사적인 현장 한가운데 있는 듯해 두근거렸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동네처럼 온갖 편의시설이 다 있는 곳에서 살다가 거기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

“애들 학교는 어떡하려고? 신도시는 학군이 안 좋아.”

“애들 민감한 시기에 괜히 전학 갔다가 적응 못하면 큰일이지.”

“주변에 온통 공사판이라 먼지 나서 창문도 못 열어놓고 산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들 이사할 경우 생길 문제점만 나열했다. 생각해 보면 그 동네에서 뿌리박고 안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같은 대답만 돌아온 거였다. 한 동네에 10년, 20년씩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회의적인 답만 주는 게 당연했다. 이사 얘기를 꺼냈다가 안 좋은 점만 잔뜩 듣고 와서 풀 죽기를 몇 번 반복하다 지레 포기했다.

하지만 빗속에서 사는 곳을 바꾸라는 내레이션을 듣는 순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변화가 없는 동네가 문제가 아니라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서 너무 커질 대로 커진 탓이었다. 그렇게 ‘이사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전 01화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