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망설였지만 한번 결정되니 일사천리로 이사가 진행됐다. 모델 하우스를 구경한다고 수시로 들락거리며 구경한 덕에 신도시에 대한 정보는 많았다. 가고 싶은 아파트는 쉽게 정했고 매매냐, 전세냐 기로에서 ‘일단 살아보고 결정하자’로 가족들 의견이 모였다. 살던 집은 전세를 놔 세입자를 들이고, 이사 갈 곳도 전세로 가기로 결정했다.
평일에 시간을 내기 어려운 남편을 대신해 전셋집은 아이들과 보러 다녔다. 이제 아이들이 웬만큼 커서 어떤 집을 구할지 함께 의논하니 제법 든든했다. 방학이어서 시간도 많았다. 셋이 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전세 물건 나왔어요’ 부동산 전화가 오면 바로 출동해서 보기를 수차례.
매매도 아니고 전세니까 구하기 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층과 향이 마음에 들어도 융자가 많이 있는 집에는 전세로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내가 괜찮다고 판단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융자가 많은 집에는 전세로 들어오지 않으니 나갈 때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이때부터 우리 애들은 내가 부동산 전화를 받으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끊기가 무섭게 물었다.
“엄마, 융자 있대, 없대?”
“층은? 앞에 가리는 건 없고? 남향집이야?”
엄마 쫓아서 열심히 다니더니 별걸 다 물어본다 싶어 웃음도 났다. 아이들도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로 들떴다. 특히 큰아이는 어린이집 친구들이 그대로 중학교까지 이어졌는데 이게 관계가 돈독해진다는 장점도 있지만 새로운 관계를 향한 호기심이 한창 왕성한 사춘기 시절에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는 ‘전학생’이 돼보고 싶다며 하루빨리 집을 구하기만 초조하게 기다렸다.
신학기도 다가와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융자 있는 집 밖에 남은 게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런 집에라도 들어갈 심산으로 ‘전세보증보험’을 알아보던 차에 드디어 부동산에서 융자도 없고 층과 향이 좋은 집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각자 자기 방에서 또 부동산 대기조로 있던 아이들에게 ‘출동’ 명령을 내리고 쏜살같이 집을 보러 갔다. 약속한 4시쯤 도착해서 보니 커다란 부엌 창문을 통해 오후 볕이 쏟아지는 집이었다. 마음에 꼭 들었고 그 길로 계약을 했다.
익명의 도시에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10여 년을 살았던 동네에선 콩나물 한 봉지를 사러 나갔다 와도 중간에 아는 사람 서넛은 만났다. 10분이면 다녀올 길이 중간중간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하랴, 근황 전하랴, 30분은 걸렸다. 아이들 어릴 때는 그것도 사는 재미려니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데 들이는 시간이 아까웠다. 무엇보다 그 잠깐 나누는 수다에서 집에 돌아오면 기억나는 게 없었다는 게 문제다.
<당신이 옳다>에서 정혜신 박사는 서로에게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물어볼 것을 권했는데 그렇게 수시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중 누구도 내 마음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런 질문을 할 생각을 못했다. 아이가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반찬가게는 어느 집을 이용하는지, 요즘 부동산 시세는 어떤지,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같은 화제는 대단한 정보도 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마음에 어떤 위안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와 달리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오니 밖에 나가는 게 자유로웠다. 누구를 불쑥 만날지 모른다는 걱정에, 굳이 갖춰 입지 않아도 됐고 음식점에서 밥도 혼자 편하게 사 먹었다. 예전 동네에선 어쩌다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면 꼭 별로 안 친한 이웃들이 무리 지어 들어오면서, ‘어머, 00 엄마, 왜 혼자 먹고 있어?’라고 물어봐 혼자 식당에 가는 것도 신경이 쓰였는데 말이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