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원, 산시성
육출기산(六出祁山)
제갈량은 228년부터 234년까지, 6년 동안 다섯번의 북벌을 감행해, 기산(祁山)으로 진격했다.(육출기산이라고 하지만, 실제 제갈량의 북벌은 다섯번이다. 숫자가 하나 비는 것은, 3차와 4차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가, 촉의 공격이 아닌 위의 공격이었기 때문에 제외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장원은 그 중 마지막인 다섯번 째 북벌 때 촉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인데, 오늘 날 그 오장원을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2천년이 지난 지금의 중국지도에 오장원(五丈原) 이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애초에 오장원은 도시나 성이 아니라 병사들이 주둔해 있던 고원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찾아낸 오늘날 오장원의 위치는 산시성 바오지시 치산현의 현성 남쪽 20km 지점에 있는, 120m 높이로 솟아오른 언덕 위였다. 위치는 알아냈지만 바로 가는 교통편이 있을리 만무했기 때문에 우선은 가장 가까운 도시, 치산(岐山)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안은 복도까지 온통 사람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정작 치산에 내리는 사람은 한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기차역 광장을 빠져나가는 사람 보다, 나오는 손님을 잡으려는 택시기사가 더 많을 정도였는데, 그 중에 사람 좋아보이는 여자 운전기사를 향해 "오장원!" 하고 말했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장원. 오장엔. 우장원"
"쭈거량? 쭈거량 묘?"
오장원으로 유추되는 온갖 발음을 시도하길 대여섯번,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반가운 이름이 나왔다.(정확한 발음은 우장유엔 에 가깝다). 치산역에서 오장원 까지는 택시로 고작 10여분, 그러나 가는 내내 오르막길이 계속되어 걸어서 오르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펼쳐진 끝없는 평지를 잠시 바라보다, 우선 매표소로 걸음을 돌렸다. 티켓팅부터 끝낸 후에(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천천히 고원지대를 걸으며 그 오랜 시간에 걸친 향수를 느낄 생각이었지만, 그럴 새도 없이 표를 끊자마자 사당 입구를 향해 달려야 했다. 사람이 워낙 없어서인지, 5시면 사당 문을 닫는다는 직원의 말 때문이었다.
10월 초의 날씨가 무색할 만큼 세찬 바람이 불었고, 공기는 제법 차 입김이 새어나왔다. 온갖 쓸데 없는 것들을 팔고 있는 상점들은 장사를 포기한 듯 대부분 문을 닫고 있었다. 오장원 사당의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구름은 더욱 짙어져 불을 켜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어김없이 비가 올 모양이다.
경내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입구 좌우로 위연과 마대의 입상이 눈에 띈다. 명실공히 후반기 촉의 두 에이스 들인데, 색감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였다. 반면 입구 천정에는 언제 그려진 것인지 까마득할 정도로 군데군데 지워진 벽화들이 가득했고, 향로 속에서 타 들어가는 향 냄새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비바람 냄새를 지우고도 남을 만큼 텅 빈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청두의 무후사와 달리, 이곳은 오로지 제갈승상을 기리기 위한 장소다. 제법 큰 규모로 형성되어 있는 정원과 크고 작은 건물들을 잠시 내버려두고 그대로 직진하니, 천년이 지나도 남을 이름, 제갈량의 동상이 바로 보였다.
팔괘가 그려진 도복이라던가, 마치 도인을 연상케 하는,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 등이 촉한의 승상을 기리는 사당이라기 보다는 도교사원 같은 모습이었지만, 한 손에 쥔 부채로 미루어 제갈승상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찰나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고, 향냄새는 더욱 진하게 퍼졌다. 아무도 없는 경내에 고요하게 빗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사이 나도 모르게 큰절을 올렸다.
유비가 죽고 난 뒤 제갈량의 인생은 오로지 북벌 뿐이었다. 이릉대전의 패배로 모조리 소모된 국력의 회복도, 유비가 이루지 못한 꿈도, 당시 겨우 15세에 불과했던 2대 황제 유선의 뒷바라지도, 모두 오로지 제갈량 한 사람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렇게 약 6년간 전장을 누비던 234년의 가을, 후계자인 강유가 지켜보는 가운데 과로로 숨을 거둔다. 끝내 선제인 유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촉의 앞날을 걱정하며 수레에 앉아 죽어간 공명의 모습은, 수 많은 만화, 소설, 게임, 영화에 등장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오장추풍(五丈秋風) 이라고 쓰여진 건물 안에는, 죽은 제갈량의 생애를 기리는 많은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1차부터 5차까지 이어진 제갈량의 북벌을 지도로 그린 그림이었다.
나라와 황제를 위한 갈충진력(竭忠盡力)과 신기묘산(神技妙算)의 재주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신의 반열에 오른 제갈량이지만, 그의 후반기는 한 마디로 불 속에 뛰어드는 나방 같은 삶이었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선대의 유언이라지만 무리한 북벌로 국력을 소진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원인제공자 라는 비판적인 평가도 뒤따른다.
특히 여섯번이나 시도 하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총 사령관으로서의 책임과, 여섯번 모두 고집스럽게 기산을 고집한 전술가로서의 무능을 꼬집곤 한다. 나 역시, 학창시절에 이 문제로 친구들과 고성이 오갈 정도의 설전을 벌인 경험이 있다.
제갈량의 북벌이 그려진 지도를 보면서, 나는 이번에야 말로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제갈량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촉과 위가 처한 상황과, 그 형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가장 큰 논쟁거리는 1차 북벌이다. 한중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은 자오도, 야곡도, 기산로, 총 세 갈래가 있는데, 이중에 제갈량이 선택한 길은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기산로였다. 이는 꼭 삼국지의 팬이 아니더라도, 지도만 보면 누구나 의문을 던질만한 선택이다. 연의에서도 제갈량의 이 계책을 두고 많은 신하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특히 촉의 후반기 촉의 최정예 장수였던 위연은 노골적으로 이에 반대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 5,000명을 내어주신다면 곧장 자오곡(子午谷)에 당도하여 북쪽으로 진군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 장안(長安)에 이르러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께서는 사곡(斜谷)을 뚫고 나와 호응해주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함양(咸陽) 서쪽 지역을 평정하여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연이 언급한 자오도는 지도상에서 장안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에 해당하니, 상대적 열세인 촉의 기습작전으로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후로 네 번의 북벌 때도 단 한번도 쓰지 않았다. 이는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제갈량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그의 지위와 당시 촉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갈량도 인정했듯이, 가장 성공률이 높은 북벌은 1차 북벌이었다. 위는 유비, 관우, 장비가 모두 죽은 촉을 신경도 쓰지 않았고, 이릉대전에서 대패한 촉이 위를 공격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1차 북벌이었기에, 총사령관으로서는 가장 안전한 전략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놓고 적의 대군이 결집해 있는 장안을 공격했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이후 철저한 대비를 갖춘 위나라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해진다. 설령 기습적으로 장안을 점령했다 쳐도, 서쪽으로는 천수, 동쪽으로는 허창 으로부터 협공을 받는 형세가 되어, 촉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위연의 병사만으로 장안을 지킬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촉은 멀고 오래 걸리더라도, 적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보급과 행군이 쉬운 길을 택해, 적의 성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의 이 작전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촉의 선봉이었던 조운은 자오도에 있는 기곡으로 전진해, 위의 선봉대를 박살내고 우두머리인 하후무(하후돈의 아들이자, 조조의 부마)를 생포해왔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위는, 총사령관 조진을 직접 기곡으로 보내 조운의 앞을 가로막지만, 그 사이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로를 따라 서쪽으로 우회해, 천수를 비롯한 양주의 3개 성을 모조리 점령해 버린다.
이는 장안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자오도가 좁고 험해 대군이 한 번에 지나갈 수 없음을 이용해, 그 곳에는 소수의 병력만 진격시켜 적 본대의 발을 묶는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위나라의 수 많은 모사들 중, 천하의 조자룡이 미끼용 부대라고 꿰뚫어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천수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제갈량 자신의 뒤를 이을 초특급 인재를 발견하니, 훗날 제갈량 사후 촉의 대장군이 되어, 죽는 날까지 촉과 생사를 함께하는 바로 그 강유(姜維)다.
결국 제갈량은 섣불리 장안을 취해 서쪽의 천수와 동쪽의 수도 허창에서 오는 양갈래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적의 본대를 묶은 뒤 여유롭게 서쪽을 제압해 촉의 영토를 양주까지 확장했고, 거꾸로 천수의 본대와 남쪽 조운의 별동대가 동시에 장안을 공격할 수 있는, 확실한 전략적 우위를 얻어냈다. 북벌을 할 때 마다 한중 에서부터 이어지는 협곡잔도와 진령산맥의 험로를 넘을 필요도 없어졌다. 남은 일은 본대의 주둔지를 천수로 옮기고, 그곳에서 식량을 보급한 뒤, 자오도에 비하면 8차선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오장원으로 진출해 장안을 취하는 것뿐이었다.
책략은 사람이 세우고, 그 성공은 하늘이 정한다고 했던가. 완벽한 촉의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역사는, 단 한번의 싸움, 단 한 명으로 인해 송두리째 뒤바뀐다. 천수에 주둔한 촉은, 그 곳에서 본대가 장기전을 준비하는 동안 장안에서 오는 위의 군대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위나라 역시, 천수를 내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인 탈환전을 벌였고, 바로 이때 제갈량의 영원한 라이벌 사마의가 등장한다.
사마의의 우수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제갈량은, 마속을 가정으로 보내 절대 싸움을 걸지 말고 길목만 차단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공을 탐냈던 마속은 제갈량의 명을 어기고 산꼭대기에 진을 쳤다가 위의 장합에게 대패하고 만다. 천수로 향하는 길이 뚫리자 아직 본대가 도착하지도 않았던 촉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조운이 대치중인 기곡으로의 양공이 물거품이 된 이상, 본대가 기산에 머무는 것 역시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촉은 양주를 차지하기까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단 한차례 마속의 패배와 함께 1차 북벌 전체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촉으로서는 이릉대전 보다 더욱 뼈아픈 패배였다. 실질적인 손해는 거의 없었지만 이 후 위는 한중에서 뻗어 나오는 모든 길목에 거대한 성을 쌓기 시작했고, 천수를 비롯한 세 개의 성은 고스란히 위나라의 품으로 돌아갔다. 제갈량은 스스로 벼슬을 깎아 승상에서 우장군으로 강등되었고, 읍참마속(泣斬馬謖) 을 하기에 이른다.
마속은 제갈량의 형제나 다름없던 친구 마량의 동생이었으며, 제갈량이 가장 아끼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제갈량으로서는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 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유비가 생전에 절대 마속을 중히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장면을 두고, 이 역시 사람을 잘못 쓴 제갈량의 실패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친 비판이다. 장판파의 장비가 갔다고 한들, 제갈량의 말을 어기고 산 위에 진을 쳤다면 패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촉의 유일한 강점이었던 기습이 사라진 이후, 제갈량은 매 북벌 마다 위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퇴각한다. 228년 2차 북벌에서는 진창으로 진격했으나 학소의 농성에 가로막히고 말았고, 3차 북벌에서는 무도와 음평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4차 때에는 어이없게도 촉의 식량 담당이었던 이엄의 직무태만으로 보급이 끊겨 퇴각하였는데, 그 와중에도 위의 맹장 장합을 죽인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운명의 234년, 제갈량은 마지막 남은 국력을 쥐어짜내 5차 북벌에 오른다. 이 때 즈음 위는, 촉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성문을 걸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제갈량 역시 오장원으로 진출한 뒤 그 곳에 아예 눌러 앉아 버린다.
아마도 제갈량 본인도 자신의 생명이 끝나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가운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던 그는, 매일매일 이 언덕에서 멀리 사마의의 진영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국 어느 바람 불던 가을날, 강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준 제갈량은, 장안을 지척에 두고(오장원에서 장안까지는 평지로 100km 정도 거리다) 과로로 눈을 감는다. 위는 제갈량이 죽음을 알기 전까지 단 한 차례의 싸움도 걸지 않다가 그의 죽음을 알자마자 공격을 개시했지만, 역시 죽은 제갈량의 계책에 패주해 추격의 고삐를 놓친다.
화려하다면 화려하고, 무상하다면 무상한 삶 이었다. 결국 실패로 끝난 북벌이었지만 영명천고(英名千古) 라고 적힌 글자처럼, 그의 이름은 천 년을 넘어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남았다. 이 날 오장원에는 꼭 그 때처럼 차가운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