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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Apr 11. 2021

혼자가 혼자에게

몇 년 전 일이다. 띠동갑인 사촌동생이 생전 처음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는데 걱정이 많다고 했다. 어떻게 한 달 동안 혼자 그 모든 걸 짊어지고 다니느냐고. 그렇게 걱정이 많으면 혼자 가질 말아야지 라고 하려다 그냥 다 어떻게든 굴러갈 거라고 말했다.


나 역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는 주로 혼자 여행을 다녔다. 혼자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여행이다.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돈 쓰는 습관을 점검할 기회가 된다는 거다. 여행지와 일상에서의 소비 패턴이 같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홀로 떠나보면 무언가에 양보 불가능한 적정선이 명확하게 보인다. 누군가는 먹는 것에, 또 누군가는 자는 곳, 혹은 하고 보는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다. 


과거의 나는 대체로 숙소에 관대했다. 20대에 처음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도미토리를 예약했는데 웬일로 손님이 나 혼자였다. 저렴한 가격에 사람도 없어서 횡재인 줄 알았지만 밤이 되자 왜 그 숙소에 사람이 없는지 깨달았다. 오키나와의 여름은 꽤 혹독한데, 그날 밤도 엄청 더웠다.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베개 시트가 젖는 게 느껴질 정도로. 방안에 에어컨이 있긴 했지만 유료였다. 오락실 기계처럼 100엔짜리를 넣으면 한 시간 동안 작동하는 방식이었는데, 참다 참다 자정 즈음 처음 동전을 넣었다. 정확히 한 시간 뒤 잠에서 깬 뒤 다시 고민에 빠졌다. 결국 또 동전을 넣었는데, 미리 동전을 넣어두면 알아서 계속 작동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몇천 원으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에어컨이 꺼지는 시간마다 일어나 동전을 넣었고 결국, 하룻밤에 500엔을 에어컨 값으로 썼다. 


돌이켜보면 혼자인 그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줬다. 혼자 시간을 쓰고, 혼자 질문을 하고, 혼자 대답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외로움과의 싸움. 그 싸움에서 이기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기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혼자 하는 여행은 더 치열하다. 스물아홉, 1유로가 1,800원이 넘던 그 해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 속 내 사진을 지금 보면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웃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누군가 쉬고 가라고 해도 그럴 여유도 없을 때였으니.



이제는 3일 내내 먹다만 사과가 그대로 방치되는 호스텔의 8인 도미토리에서 더 이상 묵지 않는다.(호스텔 자체를 잘 가지 않는다.) 맥주 한잔으로 저녁 끼니를 때우는 여행도 더는 하지 않는다. 줄이 길게 늘어선 유명 관광지의 대기열에 서기보다는 현지의 풍경 속에 몇 시간씩 녹아들어 있는 걸 좋아한다. 별다른 건 없고 카페나 공원에 그냥 널브러져 있는 거다. 혼자보다는 연인과,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이 좋다. 주로 세명을 선호한다. 어떻게든 결정이 지어지는 숫자니까. 그래서인지 혼자 여행을 떠나도 오히려 어렸을 때보다 더 자연스레 동행을 구한다. 뜻하지 않게 친구가 되어 인연이 이어지기도 한다. 어릴 때는 오히려 낯설고 부담스러웠던 그 과정이 이제는 부드럽고 따스하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조금 특별한 경험을 했다. 부다페스트에서 파리로 가는 도중에 이탈리아에 발도장이나 찍자는 생각에 잠시 밀라노에 들렀을 때다. 길게 머물 생각은 없었고, 도착한 다음날 오후에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바로 오를 계획이었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지만 에어비앤비 주인이 추천해준 괜찮은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 동행이 필요했다. 4월의 햇살이 내리쬐는 밀라노의 정오. 분수대가 아름다운 어느 로터리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처음 보는 한국인 두 명과 만났다. 한 명은 스튜어디스였다. 숙소가 공항 근처기에 한번 나오면 뽕을 뽑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나머지 한 명은 퇴사 후 유럽 여행을 시작했단다. 


딱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날 파리로 출발하는 세시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가리발디 역 근처에 있는 Eataly로 갔다. 각자 와인 한 병씩 집어 들고, 안주로 딸기 한 상자를 사선 그대로 근처 화단에 걸터앉았다. 이야기는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 이어졌고, 태양 때문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양 볼이 화끈화끈거렸다. 오후 3시의 밀라노 어느 화단에 앉아 와인을 병나발로 불고 있는 동양인 세 명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터무니없고 기묘한 인연이다. 


혹시 누군가 우리를 사진으로 찍은 사람이 있다면 꼭 전해주시길. 혼자가 혼자에게 떠들어 대는 이야기가 그렇게 신나는 일은 드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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