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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May 17. 2023

<봄밤>을 보며 용기가 커졌다

돌싱, 연상연하, 8살 차이

나는 산뜻한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 로맨틱코미디보다는 조금 무거운데, 전통 멜로보다는 조금 경쾌한, 그런 상큼한 멜로.

남편과 둘이 만나기 시작할 때쯤 우연히 tv에서 드라마 <봄밤> 예고편을 봤고 정말 오랜만에 본방사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고편 속 드라마의 분위기가 내가 딱 원하는 분위기였고, 정해인의 미소가 눈부시게 예뻤으며, 그때만 해도 그런 내용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간단하게 어떤 얘기냐면, 오래된 연인과의 이별을 고민 중인 여자가 싱글대디와 환승연애 하는 얘기.


첫 화를 보고 난 후 대충 그런 스토리의 드라마인 걸 알게 되어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의외로 마음에 꽂히는 대사들이 많아 결국 끝까지 봤다. 점점 더 몰입하면서 ㅎㅎ (노래에서는 가사에 진심이라면, 드라마에서는 대사에 진심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사귀자는 말이 곧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했고, 약 일주일 동안 '이 연애, 해도 되는 걸까?'와 '만약 시작한다면 내가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해 두통이 올 만큼 고민했다. 서로 도저히 맞춰질 수 없어, 연애에서는 자잘하게 몇 번 데었고, 결혼에서는 크게 한 번 제대로 데이며 이혼을 했다. 그 결과 남녀관계를 잘 유지하는 데 대한 나의 자신감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게다가 남편은 결혼 경험도 없고 연애 경험도 별로 없어 보였다. 더구나, 나보다 무려 8살이나 어리다니! 만나기에 무척 부담스러운 상황인 게 대충 봐도 확실했다.


그런데 그 고민의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에 이 드라마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서 한 번은 정리하려 했던, 가끔 생각날 때마다 들춰보고 싶어 일부러 찾아 기록해 놓았던 드라마 속 대사들과 그때의 내 생각들에 대한 여담을 지금 해보려 한다.



1.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아니면 진짜인 거야? 왜 이렇게 여유가 넘쳐?"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흥분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웬만해서는 크게 놀라는 편도 아니고."

"어른이네."

"일찍 세게 놀래봐서."


나에게는 3살 터울의 발달장애 1급 남동생이 있고, 그 아이와 함께 하면서 평범치 않은 일들을 수없이 겼었다. 어릴 적부터 워낙 세게 놀라는 일들이 반복되어 웬만한 일에는 침착함을 유지하는 편인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했던 첫 번째 결혼과 이내 이어진 이혼은 이런 나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고 흉터가 깊게 남은 상처였다.

하지만 이혼을 겪으면서 내가 가장 놀란 점은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원가족이 아닌 타인과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면서에야 비로소 드러나던, 미처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었다. 그때의 미성숙한 사고와 행동은 내 자존감에 심한 스크래치를 낸 동시에 나에 대해 정말 많은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나는 겉으로는 모범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혼은 내가 그 궤도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타인들에게 보여준 첫 번째 사건이기도 했다.

내가 듣기에 저 짧은 대사는 진짜 큰 일을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담백한 말 같아 무지 짠하고 찌릿했다.

 


2.


"가끔 혼자 밥 먹고 들어오다가 상상했거든요.

햇볕이 좋은 날 좋아하는 사람하고 공원 같은 데서 이렇게 밥 먹으면서 웃고 떠들면 좋겠다.

나한테도 그런 날이 올까? 별거 아닌데 참 해보고 싶었어요."


"일종의 그런 거? 사소한 로망?

진짜 별거 아닌데 막상 못 해본 것들이 너무 많아."


저 장면을 보면서는 가끔씩 상상하던 내 연애 로망이 떠올라 기분이 좋았다. 그때의 나는 날씨 좋은 날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로를 여유롭게 걸으며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로맨틱하게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상의 작은 평화로움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지에 대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소한 로망', '진짜 별거 아닌데 못 해본 것들'이란 표현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3.


"간만에 인간 같네. 잘했다."

"뭘 잘해?"

"조금만 흐트러지면 큰일 날 것처럼 기계적으로 살았잖아.

반듯하긴 한데 인간미는 없었어."

"그게 잘못된 거야?"

"잘한 것도 아니지."

.

.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모르겠어. (...) 무조건 참아야 살 수 있겠더라고.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온갖 감정을 누르지 않으면 진짜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 같았어."

"날 통제했지. 그동안의 생활, 행동, 말 심지어 생각까지. 그나마 견디게 되더라구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때 일이나 은우엄마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근데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 어떤 감정도 없어. 그게 서글플 때도 있어."


이 두 부분은 각기 다른 장면에서의 대사이지만, 맥락이 이어져 한꺼번에 엮어봤다.


그냥 대사만으로도 이혼 후 나의 생활에 대해 이해가 되고, 그에 대한 설명이 되어 울컥했다.

아, '통제'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구나.

아, 어떤 감정도 없는 걸 서글프다고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구나.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는 과정이 내 기준으로 너무나도 무례해서 불만족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만남에 다가서는 주인공들에게 더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때, 남편 같은 사람이라면 나도 용기를 내야 할 때라고 느꼈다.

나에게 <봄밤>은 그래서 특별하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드라마였다.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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