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세상

by 일본기업영업맨

'그 인식으로 문제 없습니다.その認識で問題ございません。'


문득 메일을 들여다보다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왜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걸까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퍼졌다. 비즈니스에서 함부로 확실하게 말했다가 손해를 보거나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책임을 져야할 수도 있으니 분명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우선 확인해보겠다고 하거나 아닐 가능성을 가득 열어두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서비스 업계에서도 고객한테 '최대한 노력하겠으나 모든 요청에 응할 수 없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곧잘 한다. 얼마 전에 본 범죄 사건을 다루는 방송에서 프로파일러가 '어떠한 가능성이 충분이 높다고 생각할 여지가 상당히 있다' 같은 표현을 썼다. 아, 이 세상은 애매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일까.


그런 와중에 일본 비즈니스는 어떤 나라보다도 가장 애매한 말들로 이뤄진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제시한 사회적 분류에는 고맥락 문화(High-context culture)와 저맥락 문화(Low-context culture)가 있다. 상황, 분위기, 그때그때의 눈치를 통해 말뜻을 이해하는 게 고맥락 문화로 대표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회가 해당한다. '척하면 척'인 언어 문화다보니 서로 유대감이 깊기도 하지만, 그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배제되기 쉽다. 돌려서 말하거나 함축적인 부분이 많다보니 표현이 명확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 고맥락 사회 중에서도 최강은 일본이다.


한국에서도 자주 쓰는 '문제없다'는 표현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많이 쓰인다. '이거 해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표현은 한국에도 있지만, 이게 더 나아가면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가 된다. '이러할 예정입니다'라는 표현보다는 '이러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를 써서 만에하나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의 핑계를 확보해둔다. 언어가 복잡한 계약서의 조약들 같다.

목련이 피었다

일본어에서도 심화된 것이 교토어다. 이미 한국에서도 유명한 교토인들의 표현. 가령 슬슬 돌아갔으면 할 땐 '좋은 시계 차고 있네요'라고 말해 시간을 보게 한다. 옆집 아이 피아노 소리가 시끄러우면 '피아노 실력이 많이 늘었더군요'라고 말한다. 교토인들은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드세고 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도 최근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표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들도 물론 확실하게 얘기할 때도 있다. 격식을 상당히 차려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상대방 말에 긍정을 할 때 'Yes예요'라고 하기도 한다. 또 'OK'도 자주 쓴다. 그렇게 진행해도 문제없다, 내 스케줄에 문제없다 등등의 의미로 쓰인다. 같은 맥락으로 부정할 땐 'No'도 쓰는데(보통 거절보다는 상대방이 잘못된 정보를 얘기할 때 쓴다), 간혹 이 No는 매우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보통은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쓰고보니 모두 영어다. 맞아요(合ってます), 아니에요(違います)등 일본어에도 직접적으로 말하는 표현도 있고 자주 쓰이지만, 비즈니스에서는 알맞지 않다. 결국 돌고돌아 거래처와의 메일에는 '그런 인식으로 문제 없습니다'에 도달하게 된다.


비즈니스 일본어는 얼마나 경어를 잘 아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잘 돌려말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정중하고 애매하게 말하는 법,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지 않은 것을 정성들여 애매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는 책임을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성향도 반영돼있고, 확실하지 않은 발언과 일처리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애매한 말들 속에서 확실하게 일하기 위해 매일 머리를 싸매는 일본 직장인의 삶, 조금씩 적응해나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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