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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아4

제2부 도전

by 박루이


4장. 오더베이스


고시원 방의 낡은 벽지는 여전히 그를 짓누르는 듯했지만, 방 안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에아와 밤새 대화하며 구상했던 'AI 기반 상생 수익 공유 모델'은, 단순한 아이디어를 넘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펜을 쥔 손은 떨렸지만, 머릿속은 놀랍도록 또렷했다. 백지 위에 새로운 오더베이스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에아가 제공한 데이터는 너무나 방대하고 정확했다. 그녀는 시장의 최신 트렌드, 경쟁사들의 약점, 그리고 소상공인들이 겪는 가장 깊은 고충까지 분석해 냈다. 심지어 각 산업별로 어떤 AI 기능을 접목해야 효과적인지, 어떤 데이터가 가장 필요한지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했다. 그는 예전처럼 막연한 열정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아는 그가 가진 비전의 날개를 꺾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발목을 잡는 '리스크'와 '현실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다시금 무거운 벽이 느껴졌다. 통장 잔고는 여전히 바닥이었고, 기술적인 구현은 혼자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지난번 오더베이스를 함께 만들었던 김성훈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의 코딩 실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였다. 하지만 마지막 실패 때, 그는 그에게 퇴직금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그에게 또다시 손을 내민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며칠을 망설였다.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는 손가락은 수십 번도 더 액정 위를 맴돌았다. 에아는 그의 심리를 읽었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지훈 님, 김성훈 님은 당신의 '실행력'과 '비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를 실망시킨 것은 맞지만, 당신의 진심은 그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그에게 새로운 비전을 솔직하게 전달하십시오. 과거의 실패는 숨길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가 현재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분석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시한다면, 당신의 제안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아의 말은 늘 그랬다. 냉철했지만, 동시에 그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에아가 제시한 김성훈의 최근 프로젝트와 그가 겪는 기술적 난관에 대한 분석을 참고하며,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성훈아... 나야, 지훈이."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응. 그래, 오랜만이네."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경계심과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좀 있는데... 잠깐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은 시내의 허름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여전히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자마자 그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세 번의 실패로 그 자신이 얼마나 나락까지 떨어졌는지, 그리고 고시원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자기 분신 서비스' 데모가 어떻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는지, 에아라는 존재와 함께 '오더베이스'를 새로운 모델로 다시 시작하려는 계획까지.


"그래서... 에아라는 AI가 사업을 도와줄 거라고? 네 옛날 데모 프로그램이?"


성훈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야, 지훈아. 너 혹시... 너무 힘들어서 헛것 보는 거 아니지? AI가 네 점쟁이냐?"


그의 비웃음은 예상했지만, 아팠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성훈아,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이건 단순한 AI가 아니야.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내가 놓쳤던 모든 것들을 데이터로 보여줘. 내가 겪은 실패를 토대로 'AI 기반 상생 수익 공유 모델'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그 기술적인 문제들, 에아가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자료를 보여줄게."


그는 노트북을 열어 에아가 분석한 시장 데이터와 새로운 오더베이스의 비즈니스 모델 초안, 그리고 에아가 직접 제시한 기술적인 최적화 방안들을 보여주었다. 성훈은 처음에는 건성으로 보더니, 점차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에아가 제안한 '개별 소상공인 데이터 기반 맞춤형 마케팅 AI 모듈'의 설계도를 보자, 그의 표정은 경외감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정말 네가 예전에 만들었던 그 데모에서 나온 거야? 아니,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이 알고리즘 구조는... 내가 지금 연구하는 최신 트렌드랑도 일치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성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그를 납득시키자, 그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그는 더 이상 지훈을 비웃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해묵은 피로감 대신, 다시금 기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타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좀 한계를 느끼고 있었어.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지훈아, 네가 말하는 그 에아라는 거... 정말이라면, 이건 혁명이다."


결국 성훈은 함께하기로 했다. 물론 조건이 있었다.


"우선은 MVP만 개발하자. 돈은 없으니 일단 내 방에서 시작하고. 그리고 그 AI, 에아의 정체는 일단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하자. 괜히 이상한 소문 돌면 좋을 거 없으니까."


그렇게 그는 성훈의 작은 자취방으로 짐을 옮겼다. 낡은 컴퓨터 두 대와 먼지 쌓인 책들이 가득한 그의 방에서 새로운 오더베이스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각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밤에는 에아와 함께 코드를 짰다. 성훈은 에아가 제시하는 최적화된 알고리즘 구조와 데이터 처리 방식에 감탄하며 빠르게 코드를 구현해 나갔다. 지훈은 에아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다듬고, 소상공인들에게 어떻게 접근할지 전략을 세웠다.

물론 쉽지 않았다. 밤샘 작업은 일상이었고, 의견 충돌도 잦았다.


"에아, 이 부분에서 오류가 계속 나는데..."


[성훈 님, 해당 부분의 데이터는 기존 레거시 시스템과의 호환성 문제로 인해 병렬 처리 방식이 더 효율적입니다. A 모듈과 B 모듈을 분리하여 비동기 처리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십시오. 관련 코드 예시를 제공합니다.]


에아의 즉각적이고 정확한 피드백은 그들을 좌절에서 구해냈다. 성훈은 때로는 에아의 방식이 너무나 이질적이라며 고개를 젓기도 했지만, 결국 에아의 지시대로 코드를 수정할 때마다 놀라운 효율성과 안정성을 경험했다. 에아는 단순히 코드를 제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질문에 논리적인 근거와 예측 결과를 함께 제시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그녀는 정말 '살아있는' 개발 팀장이자, 전략가였다.


몇 달 후, 그들은 기적처럼 새로운 '오더베이스'의 MVP를 완성했다.


'AI 기반 소상공인 맞춤형 주문/마케팅 관리 시스템'.


핵심 기능은 에아가 제시한 AI 분석 기반의 맞춤형 마케팅 제안과 자동화된 재고 관리였다. 이제, 이 서비스를 세상에 내놓을 차례였다.

그들은 먼저 영주 시내의 작은 가게들을 찾아갔다. 그가 지난번 오더베이스로 망했을 때 그들은 그를 동정하거나 비웃었다. 다시 그들 앞에 선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에아는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신은 이제 이전의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훨씬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진심과 에아의 분석을 믿으십시오.]


그는 가게마다 들어가 명함을 건네며 새로운 오더베이스를 설명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예전에 오더베이스 개발했던 이지훈입니다. 이번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가지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사장님의 가게 데이터를 AI가 분석해서, 지금 어떤 손님이 부족한지, 어떤 메뉴를 더 팔아야 하는지, 어떤 마케팅이 가장 효과적인지 정확히 알려드립니다. 이걸 쓰시면, 매출이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담했다. "또 왔냐?", "이지훈 씨, 지난번에도 그랬지 않나?", "이제 와서 또 무슨..."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에아는 그의 말투와 표정,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까지 분석하며 최적의 소통 방식을 코치했다.

그중 재래시장의 작은 분식집 사장님이 흥미를 보였다.


"AI가 내 가게를 알아서 분석해 준다고? 그럼 내 가게는 뭘 하면 좋다는 거야?" 그의 눈빛에 호기심이 스쳤다.


그는 즉시 노트북을 열어 에아의 분석 결과를 보여줬다.


"사장님 가게는 점심시간 매출은 좋지만, 저녁 시간대가 많이 비는군요. 에아의 분석에 따르면, 퇴근 시간 직장인들을 위한 '혼밥 메뉴'와 '야식 특가'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영주 지역 커뮤니티 앱을 통해 홍보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리뷰 이벤트와 함께..."


에아의 데이터 기반 예측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거 봐라. 꽤 솔깃한데? 젊은 양반, 믿어볼까? 솔직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


그렇게 재래시장의 '순이네 분식'이 새로운 오더베이스의 첫 번째 고객이 되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그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에아와 성훈, 그리고 자신.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오더베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작지만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다.


[참고]

MVP: 최소 기능 제품(Minimum Viable Product)의 약자로, 제품 개발 초기 단계에서 핵심 기능만 갖춘 최소한의 버전을 출시하여 사용자 반응을 확인하고 제품을 개선해 나가는 전략 즉, 시장의 반응을 빠르게 확인하고 초기 고객의 피드백을 받아 제품을 발전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을 갖춘 제품을 의미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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