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로마서 9

제9장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

by 박루이


제9장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 (곡 37-42 / 로마서 9장)


로마서 8장의 마지막은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절대적인 승리의 선언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선언은 즉시 하나의 심각한 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이 이토록 확고하다면, 어째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대다수는 그들의 메시아이신 예수를 거부했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했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되었는가?


로마서 9장은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다. 그는 자신의 동족을 향한 깊은 사랑과 고뇌로 이 노래를 시작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비의 영역으로 이끌고 간다. 이 장은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질문들을 던지지만, 결국 모든 인간적인 주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와 권리 앞에 잠잠히 엎드리게 만드는 경외의 찬송이라 할 수 있다.


제37곡.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로마서 9장 1-5절)

https://youtu.be/_6Kl_eCS64g

롬 9: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은 이 민감한 주제를 시작하며, 먼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마음이 어떠한지를 절절하게 토로한다. 그는 성령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하며, 자기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한다(1-2절). 그의 고통은 너무나 커서, 만일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말한다(3절).

무엇이 그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는가?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특권들을 하나씩 열거한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됨), 영광(임재의 상징), 언약들, 율법, 예배, 약속들이 있었고,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그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다(4-5절).¹ 이 모든 특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현실이, 바울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고통의 근원이었다.


제38곡.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로마서 9장 6-13절)

https://youtu.be/58BN_f_sydE

롬 9:6-1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약속의 실패인가? 바울은 단호하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라고 선언한다(6절).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은 혈통적인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안에 존재하는 두 종류의 후손을 구별한다. 육신적인 후손과 약속의 후손이다.

그는 두 가지 구약의 예를 들어 이를 증명한다. 첫째,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약속의 자녀로 여김 받았다(7-9절). 둘째, 리브가의 아들들인 에서와 야곱의 경우,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다(10-12절). 이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나 자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이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²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13절).


제39곡. 그런즉 우리가 (로마서 9장 14-18절)

https://youtu.be/XJed2um6gEk

롬 9:14-1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선택은 즉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는 반론을 불러일으킨다(14절). 바울은 다시 한번 “그럴 수 없느니라(μη γενοιτο)!”고 외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하기 위해 다시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다(15절).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16절).

긍휼의 반대편에 있는 ‘완악하게 하심’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가 너를 세운 것은 내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17절). 바로의 완악함마저도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결론은 명확하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절).³


제40곡.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로마서 9장 19-24절)

https://youtu.be/tlMAYVJFYig

롬 9:19-24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설명은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는 두 번째 반론을 낳는다(19절).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논리적인 답변 대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질서로 답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0절).

바울은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리를 역설한다. 토기장이가 한 덩이의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는 것이다(21절).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게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22-23절). 그리고 이 긍휼의 그릇은 바로 우리, 즉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라고 선언한다(24절).⁴


제41곡.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로마서 9장 25-29절)

https://youtu.be/HtDAfTRzRhg

롬 9:25-29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자신의 논증이 독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임을 증명한다. 그는 호세아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르실 것, 즉 이방인을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셨음을 보여준다(25-26절). 또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수많은 자손 중에서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고 예언하셨음을 보여준다(27-29절).⁵ 현재 이방인이 구원받고 이스라엘의 다수가 불순종하는 상황은 하나님의 계획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제42곡.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로마서 9장 30-33절)

https://youtu.be/XwTc0zkRc7I

롬 9:30-3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9장의 마지막 노래는 이 모든 논의의 결과를 역설적인 요약으로 마무리한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30-31절). 어찌된 일인가? 이스라엘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그 결과 그들은 ‘부딪칠 돌’에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32절). 그 돌은 바로 이사야서에 예언된 시온에 두신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였다. 그러나 그 돌은 넘어지게만 하는 돌이 아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이 함께 주어진 구원의 반석이기도 하다(33절).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은 하나님의 불의가 아니라, 행위를 의지하여 믿음의 길을 거부한 그들의 불신앙에 있었다.


각주

¹ 존 스토트(John Stott)는 5절의 마지막 구절(“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이 성부 하나님이 아닌 그리스도를 향한 찬양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John Stott, The Message of Romans: God's Good News for the World (Downers Grove: IVP Academic, 1994), 263.)

² 더글라스 무(Douglas J. Moo)는 이 구절이 개인의 구원 예정에 대한 교리적 진술이라기보다는, 구속사에서 이스라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방식을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나 그분의 자유로운 은혜에 근거한다.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6), 579-581.)

³ 존 파이퍼(John Piper)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이 구절을 해석한다. 그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의 긍휼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바로의 완악함을 통해 자신의 진노와 능력을 보이시는 것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그 긍휼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배경이 된다"고 주장한다. (John Piper, The Justification of God: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Study of Romans 9:1-23 (Grand Rapids: Baker, 1993), 145.)

⁴ C. E. B. 크랜필드(Cranfield)는 바울이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만드셨다고 말하지 않고 ‘멸하기로 준비된’이라고 수동태로 표현하고,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예비하신 바’라고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미묘한 차이에 주목한다. (C. E. B. Cranfield,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ICC (Edinburgh: T&T Clark, 1979), 499-500.)

⁵ F. F. 브루스(F. F. Bruce)는 바울이 ‘남은 자(remnant)’ 사상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신실한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Romans, TNTC (Grand Rapids: Eerdmans, 1985),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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