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그리고 원작
'아이 유진 - 청소년 유진 - 어른 유진'이 있다. 어릴 적 상처를 겪은 유진이,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아픈 성장통을 겪고 있는 유진이, 성인이 되어 그때 자신과 엄마를 회상하는 유진이. 그리고, 세상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수많은 유진이들.
뮤지컬 <유진과 유진>은 어릴 적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유진이 어른이 되어 과거를 함께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사이코 드라마'의 형식을 차용하여 어른이 된 두 유진이 어릴 적 자신을 재현하기도 하고, 각자의 엄마의 역할이 되어 연기를 하기도 한다. 소극장 뮤지컬의 제약 안에서 영리하게, 한편으론 더 많은 메시지를 품어낼 수 있도록 연출한 것 같다. 각자의 상처와 회복, 그리고 엄마를 이해해가는 과정들이 어느 하나 소홀하지 않게 잘 전달되었다. 아픈 이야기를 너무 아프지만은 않게 잘 그려냈다.
뮤지컬의 원작인 이금이 작가의 장편소설이자 청소년 문학, <유진과 유진>. 어른의 시선에서 읽어본 청소년 문학은 참신했다. 주인공이 단지 청소년이기 때문에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보통 일반 소설을 읽을 때에는 문장 속에 함축된 의미를 유추하며 더듬더듬 읽느라 책장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이 책은 의미가 명백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또, 주인공의 심리가 또래 청소년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표현되었다.
※아래 글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발랄하고 털털한 ‘큰 유진’과 조용한 모범생 ‘작은 유진’은 중학교 2학년 첫날, 같은 반이 되었다. 큰 유진은 작은 유진의 얼굴을 보고 단번에 알아본다. 새싹유치원에 같이 다녔던 그 작은 유진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다가가 말을 걸지만, 어쩐 일인지 작은 유진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때 그 사건, 기억 안 나?'라고 물어보지만, 작은 유진은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두 유진은 어릴 적 같은 유치원에서 같은 상처를 겪었다. 작은 유진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해리성 기억상실증*을 앓게 되었다. 하지만 큰 유진과 가까워지면서 기억 저편의 장면들이 조각조각 떠오르기 시작한다. 엄마가 몸을 박박 문지르며 때리던 기억... '우리 엄마는 그때 날 왜 때린 걸까?'
*해리성 기억상실증: 심리적 원인으로 인하여 특정 과거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
큰 유진은 밝은 성격에, '소라'라는 베스트 프렌드도 있고, 남자 친구도 있고, 과거의 상처를 툭 털고 일어나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자 친구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벌레라도 만진 듯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어릴 적 충격이 되살아나고 만다. 게다가 '그런 애...'라는 소리를 들으며 2차 가해를 당하기까지 한다.
<유진과 유진>은 성범죄 피해를 겪은 이들이 사건 직후가 아닌, 오랜 시간 후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보통 드라마건, 영화건, 범죄 피해를 다루는 작품들은 당시 사건 자체를 집중해서 보여주기에 피해자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을 보며 분노를 느끼곤 했다. 반면, 이 작품은 상처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절망에서부터 희망의 문으로 점점 더 올라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과거의 상처는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현재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은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가족이 함께 그 상처를 안아주고 성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간결한 문장으로 메시지들이 명확하고 진지하다.
책에서는 작은 유진이 내면의 날개가 꿈틀거리며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반면, 뮤지컬에서는 두 유진이 성인이 되어 담담하게, 때론 애틋하게 과거를 회상한다. ‘잘 컸다’고 할 수 있으니 어쩌면 해피엔딩인 걸까? 책 속의 유진이들도 뮤지컬의 유진이들처럼 잘 컸을까? 책과 뮤지컬을 다 보고 난 후, 책 속의 유진이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한 유진이, 처음으로 미팅, 소개팅에 나가는 유진이, 남자 친구를 사귀는 유진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유진이, 자기를 똑 닮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유진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홀로 멋진 여성의 삶을 살아갈 유진이… 상상하는 대로 ‘평범한’ 혹은 그들에겐 ‘간절한’ 삶을 살고 있을까?
소설이 그야말로 매우 소설스러운 희망적 결말일 수 있었던 건, 작가가 비슷한 피해 경험을 지닌 딸을 둔 엄마였기 때문일 것이다. 딸의 상처가 잘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더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해 주기 위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뮤지컬도 원작과 비슷한 결로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로 조심스레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두 유진이들은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가장 아픈 성장통을 겪는 걸지도 모른다. 상처는 안 보이게 덮는 것이 아니라, 잠시 쓰라리더라도 빨간 약을 바르고 그 위에 새살이 돋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프고 절망적이지만 그 상처를 마주할 때 비로소 회복할 수 있다. 다 나은 줄 알았지만, 누군가 쿡 찌르면 다시 선명해지는 상처를 계속 봉합하고 봉합해야 하는 것이었다. 엄마의 사랑을 통해 잘 이겨내 온 큰 유진이도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져버린다. 더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서 더 잔인한 2차 가해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더 강하고, 더 소중한 존재임을 인지하면 아무리 바닥으로 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외면하지 않는다면.
작은 유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 딸로 살아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것 없이 자랐지만, 마음 한켠에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다.
큰 유진은 비교적 화목한 가정에서 밝게 자라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사춘기가 유세냐'며 유진의 맘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와 매일 같이 마찰이 있다. 오히려 어릴 적 그 사건 직후 나를 사랑한다며 꼬옥 안아주고 한 없이 잘해주던 그때가 무섭지만 더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가족이란 사랑을 줌과 동시에 그만큼 상처도 주는 관계이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더 엄격하고, 때론 서툴러서 아프게 하기도 한다. 유진이들의 상처는 두 엄마에게도 아픔이었고, 딸과 함께 성장통을 이겨내는 과정이었다. 뮤지컬 속 유진이들은 엄마 나이가 되어서 그때 우리 엄마가 참 어렸다는 걸, 엄마도 불완전한 존재였다는 걸 깨닫는다.
어디에선가 상처 속에서 처절한 날갯짓을 하고 있을 수많은 유진이들아.
네 잘못이 아니었단다. 네가 그럴 만한 일을 당해도 될 존재여서, 불행한 운명이여서가 아니야. 단지 그날, 그 장소, 그 타이밍이 좋지 못해서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어. 지금 이 시간들이 부디 한때의 성장통으로 지나가길 바란다. 앞으로 너의 날개를 조금이라도 꺾는 것이 있다면 절대로 지지마.
정말로, 네 잘못이 아니야.
뮤지컬 〈유진과 유진〉
~2021. 8. 22
드림아트센터 3관
https://mobileticket.interpark.com/goods/21004065?app_tapbar_state
책 <유진과 유진>
저자 이금이
출판사 밤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