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리 Jul 22. 2021

유진과 유진 : 상처를 마주한 채 회복하기

공연 그리고 원작

'아이 유진 - 청소년 유진 - 어른 유진'이 있다. 어릴 적 상처를 겪은 유진이,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아픈 성장통을 겪고 있는 유진이, 성인이 되어 그때 자신과 엄마를 회상하는 유진이. 그리고, 세상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수많은 유진이들.



유진과 유진

세상의 모든 유진이들에게


뮤지컬 <유진과 유진> 포스터, 낭만 바리케이트

뮤지컬 <유진과 유진>은 어릴 적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유진이 어른이 되어 과거를 함께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사이코 드라마'의 형식을 차용하여 어른이 된 두 유진이 어릴 적 자신을 재현하기도 하고, 각자의 엄마의 역할이 되어 연기를 하기도 한다. 소극장 뮤지컬의 제약 안에서 영리하게, 한편으론 더 많은 메시지를 품어낼 수 있도록 연출한 것 같다. 각자의 상처와 회복, 그리고 엄마를 이해해가는 과정들이 어느 하나 소홀하지 않게 잘 전달되었다. 아픈 이야기를 너무 아프지만은 않게 잘 그려냈다.

 

뮤지컬의 원작인 이금이 작가의 장편소설이자 청소년 문학, <유진과 유진>. 어른의 시선에서 읽어본 청소년 문학은 참신했다. 주인공이 단지 청소년이기 때문에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보통 일반 소설을 읽을 때에는 문장 속에 함축된 의미를 유추하며 더듬더듬 읽느라 책장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이 책은 의미가 명백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또, 주인공의 심리가 또래 청소년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표현되었다.


※아래 글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뮤지컬 <유진과 유진> 공연사진 ⓒ 낭만 바리케이트

발랄하고 털털한 ‘큰 유진’과 조용한 모범생 ‘작은 유진’은 중학교 2학년 첫날, 같은 반이 되었다. 큰 유진은 작은 유진의 얼굴을 보고 단번에 알아본다. 새싹유치원에 같이 다녔던 그 작은 유진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다가가 말을 걸지만, 어쩐 일인지 작은 유진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때 그 사건, 기억 안 나?'라고 물어보지만, 작은 유진은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두 유진은 어릴 적 같은 유치원에서 같은 상처를 겪었다. 작은 유진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해리성 기억상실증*을 앓게 되었다. 하지만 큰 유진과 가까워지면서 기억 저편의 장면들이 조각조각 떠오르기 시작한다. 엄마가 몸을 박박 문지르며 때리던 기억... '우리 엄마는 그때 날 왜 때린 걸까?'

*해리성 기억상실증: 심리적 원인으로 인하여 특정 과거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


큰 유진은 밝은 성격에, '소라'라는 베스트 프렌드도 있고, 남자 친구도 있고, 과거의 상처를 툭 털고 일어나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자 친구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벌레라도 만진 듯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어릴 적 충격이 되살아나고 만다. 게다가 '그런 애...'라는 소리를 들으며 2차 가해를 당하기까지 한다.



<유진과 유진>은 성범죄 피해를 겪은 이들이 사건 직후가 아닌, 오랜 시간 후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보통 드라마건, 영화건, 범죄 피해를 다루는 작품들은 당시 사건 자체를 집중해서 보여주기에 피해자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을 보며 분노를 느끼곤 했다. 반면, 이 작품은 상처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절망에서부터 희망의 문으로 점점 더 올라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과거의 상처는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현재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은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가족이 함께 그 상처를 안아주고 성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간결한 문장으로 메시지들이 명확하고 진지하다.



상처를 마주하고 회복하기


뮤지컬 <유진과 유진> 포스터, 낭만 바리케이트

책에서는 작은 유진이 내면의 날개가 꿈틀거리며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반면, 뮤지컬에서는 두 유진이 성인이 되어 담담하게, 때론 애틋하게 과거를 회상한다. ‘잘 컸다’고 할 수 있으니 어쩌면 해피엔딩인 걸까? 책 속의 유진이들도 뮤지컬의 유진이들처럼 잘 컸을까? 책과 뮤지컬을 다 보고 난 후, 책 속의 유진이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한 유진이, 처음으로 미팅, 소개팅에 나가는 유진이, 남자 친구를 사귀는 유진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유진이, 자기를 똑 닮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유진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홀로 멋진 여성의 삶을 살아갈 유진이… 상상하는 대로 ‘평범한’ 혹은 그들에겐 ‘간절한’ 삶을 살고 있을까?


소설이 그야말로 매우 소설스러운 희망적 결말일 수 있었던 건, 작가가 비슷한 피해 경험을 지닌 딸을 둔 엄마였기 때문일 것이다. 딸의 상처가 잘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더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해 주기 위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뮤지컬도 원작과 비슷한 결로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로 조심스레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뮤지컬 <유진과 유진> 안내문, 낭만 바리케이트


사춘기에 접어든 두 유진이들은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가장 아픈 성장통을 겪는 걸지도 모른다. 상처는 안 보이게 덮는 것이 아니라, 잠시 쓰라리더라도 빨간 약을 바르고 그 위에 새살이 돋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프고 절망적이지만 그 상처를 마주할 때 비로소 회복할 수 있다. 다 나은 줄 알았지만, 누군가 쿡 찌르면 다시 선명해지는 상처를 계속 봉합하고 봉합해야 하는 것이었다. 엄마의 사랑을 통해 잘 이겨내 온 큰 유진이도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져버린다. 더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서 더 잔인한 2차 가해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더 강하고, 더 소중한 존재임을 인지하면 아무리 바닥으로 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 엄마가 참 어렸구나


작은 유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 딸로 살아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것 없이 자랐지만, 마음 한켠에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다.


큰 유진은 비교적 화목한 가정에서 밝게 자라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사춘기가 유세냐'며 유진의 맘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와 매일 같이 마찰이 있다. 오히려 어릴 적 그 사건 직후 나를 사랑한다며 꼬옥 안아주고 한 없이 잘해주던 그때가 무섭지만 더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가족이란 사랑을 줌과 동시에 그만큼 상처도 주는 관계이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더 엄격하고, 때론 서툴러서 아프게 하기도 한다. 유진이들의 상처는 두 엄마에게도 아픔이었고, 딸과 함께 성장통을 이겨내는 과정이었다. 뮤지컬 속 유진이들은 엄마 나이가 되어서 그때 우리 엄마가 참 어렸다는 걸, 엄마도 불완전한 존재였다는 걸 깨닫는다.





어디에선가 상처 속에서 처절한 날갯짓을 하고 있을 수많은 유진이들아.


네 잘못이 아니었단다. 네가 그럴 만한 일을 당해도 될 존재여서, 불행한 운명이여서가 아니야. 단지 그날, 그 장소, 그 타이밍이 좋지 못해서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어. 지금 이 시간들이 부디 한때의 성장통으로 지나가길 바란다. 앞으로 너의 날개를 조금이라도 꺾는 것이 있다면 절대로 지지마.


정말로, 네 잘못이 아니야.


뮤지컬 <유진과 유진> 포스터, 낭만 바리케이트


뮤지컬 〈유진과 유진〉
~2021. 8. 22
드림아트센터 3관

https://mobileticket.interpark.com/goods/21004065?app_tapbar_state


책 <유진과 유진>
저자 이금이
출판사 밤티

http://naver.me/GxOQlKBp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