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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 Jul 31. 2022

에스프레소 한 잔 주쇼


볼로냐에서 셋째 날, 구글맵에서 별점이 괜찮은 카페를 검색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평소처럼 카페인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챠오~!”


이상하게 해외여행만 가면 그렇게 인사성이 바른 한국인이 된다.


“카푸치노 앤 디스 원 플리즈.”


인사는 이탈리아어였지만 주문은 영어와 몸짓을 섞는다. ‘내가 아는 이탈리아어는 인사말뿐이니, 이제부터 영어로 말해줘.’라는 하나의 의사 표현이다. 평소 아메리카노만 마시곤 하지만 유럽을 오면 으레 카푸치노를 시킨다. 여기에는 아메리카노가 없다는 사실쯤이야 익히 알고 있지. 훗.


주문을 하고 카페 전경을 볼 수 있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카페에 드나드는 사람들, 커피를 내리고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장님의 모습을 구경하기 딱 좋은 자리였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대화가 내 귀에는 말보다 소리에 불과했다.


아저씨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입구 쪽 바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 나도 들어왔을 때 그 신문을 보았다. 인테리어 소품인 줄 알았는데, 여기 사람들은 아직도 종이 신문을 읽나 보다. 아저씨가 신문을 사락사락 넘기는 소리가 내 자리까지 들렸고, 오랜만이라 생경하면서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사장님은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짧은 스포츠머리와 노동으로 다져진 듯한 팔근육이 이 공간의 꾸밈없는 멋스러움을 완성하고 있었다. 커피잔을 툭 내려놓는 사장님에게 “그라찌에”라고 말을 했지만,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라찌에”라고 대충 대답하며 다음 손님의 커피를 내리러 돌아갔다. 불친절이라기보다는 과하지 않은 서비스라고 해두고 싶다. 사실 유럽에서 어느 카페든, 친절한 곳을 가본 기억은 없다. 한국에서는 카페를 서비스업으로 여기지만, 여기는 식음 공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닐까. 손님들이 기대하는 건 주인의 친절함이 아니라 맛있는 커피와 쾌적한 공간, 딱 거기까지.


사장님은 웃는 얼굴에 상냥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손님들마다 주문한 메뉴를 자리로 직접 가져다주면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도 이 동네 사는 단골들인가 보다. 한 아주머니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은 메뉴를 테라스로 가져다주고 카운터로 다시 돌아오면서도 아주머니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탈리아어는 참 리드미컬한 언어다. ‘그ㄹㄹ라~찌에.’ 혀가 입천장을 찍고 허공에서 몇 바퀴 스핀을 돈다. 혀 굴러가는 소리가 이 공간에 리듬을 채우고 있었다.


내 앞 테이블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두 명이 나보다 먼저 와있었다. 내가 막 왔을 때부터 에스프레소 잔은 이미 비어 있었고, 다 마시고도 수다를 떠느라 자리를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 남자는 결국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무슨 내용이기에 티키타카 대화가 끊기지 않는 걸까. 축구 얘기? 여자 얘기? 아니, 이건 편견이지. 볼로냐는 세계 최초의 대학이 있는 학문의 도시이니까, 요새 쓰고 있는 논문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귀로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를 눈으로 한창 읽고 있는 와중에 백발의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주문을 하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바에 서서 커피를 기다렸다. 코어 운동을 열심히 하나 보다. 사장님은 할아버지 앞에 작은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놓았다. 그는 테이블을 잡지 않고, 바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입에 툭툭 털어 넣었다. 내가 볼로냐에 머문 5일 동안 가장 이국적인 장면을 고르라면 바로 이 장면이다. 유럽 사람들이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신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탈리아가 커피의 고장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백발 할아버지가 자연스럽게 에스프레소를 입에 툭툭 털어 넣고, 사장님과 서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이게 진짜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구나!’라며 실감했다. 젊은이도 노인도 한 공간에 어우러져 각자의 하루를 커피로 시작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일 년 전부터 에스프레소 바가 유행하면서, 젊은이들이 잔을 탑처럼 쌓아 올려 인증샷을 찍는 문화가 생겼다지. 여기에서 에스프레소는 오랜 일상, 우리나라에서는 인증하기 좋은 유행. 만약 쌍화차가 해외로 뻗어나간다면, 달걀노른자를 몇 개까지 넣어 마실 수 있는지 인증하는 문화가 생기면 참 별스럽고 웃기겠다.


아무튼, 백발 할아버지가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동안 사장님과의 대화는 이어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유추할 수는 없지만, 동네 주민끼리 소탈한 대화를 나누는 듯 보였다.


“오셨소~”

“에스프레소 한 잔 주쇼. ”

“날씨도 풀리는데 코로나도 잠잠해지니까 이제 사람 사는 것 같구먼요. 작년에 효도 여행 못 간 건 올해 가시는가?”

“여름에 갈 참이여. 아들내미 식구랑 시칠리아로. 우리 며늘애가 얼마 전에 둘째를 가졌다고 전화가 왔네. 더 잘됐지 뭐. 허허.”

“아이고. 축하드려요~”


사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백발 할아버지는 에스프레소 한 입 툭. 그리고 고마움의 미소를 가볍게 지었다.


“이제 손주 보는 낙으로 사는겨.”


뒤이어 손주 자랑을 몇 마디 덧붙인 다음, 한 입마저 툭. 커피를 마시며 하는 대화라고 할 게 뭐, 사람 사는 이런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백발 할아버지는 두 입 만에 잔을 비웠다.


-


한 블록 건너 카페가 있는 망리단길에서는 어쩐지 노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단지 무관심해서 못 본 걸까. 망원동에 거주한 지 9년째. 예쁜 카페와 식당들이 줄지어 생기면서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동네가 되었다. 일요일 아침, 집 앞에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러 가려 해도, 괜히 세수 한 번 해야 하고(?), 머리도 감아야 할 것처럼(?) 신경이 쓰일 정도이다. 꾸밈없는 멋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골목길에서 이 동네 토박이 노인분들을 매일 마주치곤 한다. 날씨가 화창한 아침에 집 앞 골목길에는 핑크색 블라우스의 할머니가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계신다. 할머니는 낡은 사무용 바퀴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나를 무심히 쳐다보신다. 몇 걸음 더 걸어가면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할아버지가 볕을 피해 앉아 계신다. 출근하는 사람들과 자동차를 구경하는 걸까. 하루를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오늘의 활기를 충전하고 있는 걸까. 내가 감히 그들을 서글프게 보는 시선은 물론 오만이다. 하지만, 이내 궁금해진다. 길가에 앉아 벚꽃이 흩날리는 풍경을 바라보곤 하는 할머니들은 커피를 마시러 어디로 갈까. 3년 후면 우리나라도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는데, 그 많은 노인들은 커피를 마시러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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