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오래된 것을 발견하면 발길을 멈춰 서곤 한다. 오래되었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빛바랜 간판, 이발소의 사인볼, 그리고 뚝섬역 역사 안에서 익숙한 듯 낯선 분위기를 풍기며 홀로 있는 공중전화. 익명의 지문들에 의해 숫자 버튼은 인쇄가 거의 다 벗겨져 있고, 동전도 아닌 전화카드로만 사용이 가능한 이 기기의 카드 투입구에는 ‘교통카드, 신용카드를 넣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그럼 전화카드는 어디서 구할 수 있죠?)
그래도 역무원이 관리하는지 나름 말끔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다. 전기선이 연결된 걸로 보아 전화카드를 꽂으면 수화기에서 뚜- 뚜- 신호음이 나 올 것 같지만, 그 소리를 듣는 손님이 하루에 한두 명은 있을까 싶다. 왜 여태 고집스럽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이 전화기는 혹은 전화기를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어느 누군가는 알고 있을까.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어떤 이들의 고집은 애처롭게 꺾이기도 한다는 것을.
“힙지로 들어봤어? 요즘은 을지로가 힙하다더라.”
맥주 한 잔에 노가리를 까먹던 4년 전 가을밤의 을지로 골목을 기억한다. 골목에 촘촘히 깔린 테이블과 등받이도 없이 낭창거리는 플라스틱 의자들. 누군가 만들었지만, 누구도 계획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오래 된 골목길의 정취는 몇 년 사이 청춘들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현재가 힘들면, 과거가 아련히 빛나 보인다는데. 우리는 그것을 낭만이라고 부른다. 90년대 후반에 태어난 청춘들은 심지어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에서 낭만을 찾는다.
그렇게 힙지로는 고유한 감성이 되었지만, ‘힙지로스러움’을 얻고 대신 자연스러움을 잃어갔다. 나는 과거가 조각난 그 골목에서 낭만을 논하기가 이제는 어불성설 같아서 발길을 끊게 되었다. 노가리 골목의 시작점이자 42년간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켜 온 OB베어의 간판은 내려갔다. 하지만 사장님은 여전히 그 자리를 고집하고 계신다.
“저희는 여기 있어야 됩니다.”
서울에서 오래된 간판을 떼어내는 게 한두 집 일이냐마는, 이 도시에서 하루하루 밥 벌어먹으며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념에 잠기게 한다. 나는 과연 고집스럽게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그만큼의 돈을 벌 수 있을 까. 아니, 내 삶에서 절대적으로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생기긴 할까.
무언가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고집스럽게 지켜낼 정도의 힘 이 있었고, 지켜낼 만큼 소중함을 알았다는 의미일 테다. 내가 오래된 것을 발견하면 발길을 멈춰 서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