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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 Sep 11. 2022

제가 의사 면허는 없지만,


“제가 의사 면허는 없지만, 

 시술을 꽤 잘합니다.”




[작업 가이드]


1차 시술: Liquify

광대 집어넣기

코 평수, 콧구멍 줄이기

입꼬리 살짝 올리기

승모근 내리고, 목 가늘게

팔뚝 살 및 튀어나온 살 집어넣기


1차 시술의 관건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의 물처럼 이어지는 곡선 위에 규칙을 거스르는 돌출된 형태들을 제거해야 한다.


2차 시술: Stamp or Patch

점, 잡티, 뾰루지 지우기

눈에 띄는 모공 지우기

눈 흰자 핏줄 지우기


1차 시술에서 외곽 라인을 완성했다면, 2차 시술의 관건은 건강한 아름다움이다. ‘맑고 깨끗하고 자신 있게!’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만들기 위해 밑 작업을 한다.


3차 시술: Layer blending & Blur

다크서클, 얼룩덜룩한 피부 밝기 올리기

자잘한 피부 요철 평탄화


마지막은 깐 달걀 피부를 만드는 하이라이트 작업으로, 이 단계에서 고수와 하수의 스킬 차이가 드러난다. 모공을 한 땀 한 땀 살리면서 원래 좋은 피부였던 것처럼, 얼마나 '자연스럽게' 만드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영업 기밀이므로 생략해야겠다. 아무리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여간해서는 이 작업을 생략하기 힘들다.


 

스킨케어 제품을 파는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지 3년 6개월째. 내가 가진 라이센스는 Adobe Photoshop CC. 여느 ‘의느님'보다 빠르고, 부작용이 없으며, 가용 범위가 넓다. 아, 부작용이 한 가지 있다면 당사자가 원본과 보정본을 비교하면, 심한 자괴감에 빠져서 진짜로 ‘의느님’을 찾아갈 수 있다! 아무튼, 디자이너는 고객들의 잠재적 욕구를 실체로 보여줘야 한다. ‘턱라인이 좀 부자연스러운 것 같아요.'와 같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외친다.


모공과 주름을 죄악시하라!

노화를 두려워하여라!



알고 있다. 내가 만든 그림은 결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는다. 이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자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이 규칙을 따르면 인간이 인식하기에 가장 균형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인다는 믿음을 설파했다. 그중 대표적인 믿음이 바로 황금비율 (1:1.618…)이다.


*피타고라스가 '황금비율'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인 것은 아니라고 하며, 1509년 이탈리아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가 저술한 '신성한 비례(De divina proportione)'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칭송하면서부터 수학자들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황금비율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이 수학적 명제는 인류 역사 이래 줄곧 예술계가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숭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왔다. 밀로의 비너스는 인간의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 준다고 한다. 비너스의 얼굴은 가로:세로의 비율이 황금비율과 일치한다. 가슴 폭과 엉덩이 폭의 비율 또한 황금비율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벽하다. 모나리자도, 다비드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겹친 원형과 사각형 안에서 남성이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교과서에서 한 번쯤 봤을 그 그림)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비율을 갖춘 인간이다. ‘수학적으로’.



왼쪽부터 <밀로의 비너스> 작가 미상, <모나리자>,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시대쯤에서 멈춰있는지도 모른다. 뽀얀 피부 결, 풍만한 가슴에서 시작해 타이트하게 조인 허리와 넓은 골반으로 이어지는 곡선, 나이 든 여성은 등장시키지 않는 관습까지.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기분 탓일까, 내가 예민한 탓일까.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난 원래 주름 없었는데… 원래 여기 라인이 있었는데…’ 아니, 사람은 원래 자연스럽게 늙는다. 그러니까 주름도 자연스러운 거고, 처지는 살도 자연스러운 거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이 또한 아름다워야 하잖아?! 얼굴 주름도 피보나치수열대로 생겨나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자연에도 무수한 무질서들이 존재한다. 연기는 허공에서 형체 없이 사라지고, 나뭇잎 틈 사이로 그림자는 무늬를 만들고, 매일 보는 하늘도 매일 다른 빛깔의 석양에 물든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한 자연스럽다.



이번 여름휴가 때 비키니를 입기 위해 일주일간 닭가슴살과 달걀로 끼니를 때우는 나란 인간도 부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분명 작년에는 없던 눈가 주름도, 한참 후에 없어지는 베게 자국도 차마 사랑할 수가 없다. 그냥 내 마음도 무질서한 자연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웃기게도, 스탠퍼드 대학의 한 교수는 역사적 오랜 믿음이었던 황금비율은 다 거짓부렁이라고 주장했다. 밀로의 비너스에도, 모나리자에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에도 정확하게 딱 맞는 1:1.618…의 황금비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에도, 눈에 보인다고 믿던 아름다움에도 완벽한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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