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왜 힘들어요?”
“제가 뭘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잘하고 있는데 왜 혼자 그렇게 생각해요?”
대표는 그간 내가 했던 프로젝트 몇 가지를 언급하며, 이게 잘한 게 아니면 뭐가 잘하는 거냐고 되려 물었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숫자로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직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 잘못된 기준으로 스스로 평가하지 말라고. 그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내 텅 빈 속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역시, 능력자!’
‘넌 항상 잘하니까!’
예전엔 이런 말들이 참 달콤했는데. 시시해진 걸까? 띠링. 띠링... 달콤한 몹쓸 말들과 함께 쌓여가는 요청서들을 보면서 치사량을 웃도는 압박감을 이제 견디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타인의 칭찬은 더 이상 내 원동력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걸까. 언제부터였지? 아득하고 무거운 달콤함의 침잠 상태로 서서히 빠져들어 간 게.
내 귀에 달콤한 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부모님이 내 성적표를 보고 칭찬을 해주셨을 때. 혹은 대학교 조별 과제를 하면서 내가 만든 PPT를 보고 팀원들이 감탄했을 때. 혹은 첫 회사에서 내가 만든 패키지 디자인이 고급스럽다고 칭찬을 받았을 때. 분명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 거니까, 건강한 영양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만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일터를 결국 떠나기로 했다. 일터란 내가 다녔던 회사만이 아니라, 내가 일을 하며 머물렀던 모든 공간, 노력으로 쌓아 올린 시간, 나의 우주와도 같은 것이다. 일단 최소 1년간은 생계유지를 위한 자잘한 부업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깊이 빠져있던 달콤함의 바다에서 올라와 수면 위의 내 모습을 볼 필요가 있었다.
일을 정말 사랑했다. 일을 하는 내 모습을 사랑했다. 스트레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자기 발전을 위한 좋은 동력이라며 최면을 걸었고, 인내 끝에 성취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희망 고문을 했고, 사랑하는 만큼 힘든 거라며 더 최선을 다해 껴안았다. 너무 잘하고 싶은 욕심에 심장이 뛰고 눈물이 벅찬 건 줄로 알았다. 매주 화요일 회의시간에 옆사람에게 들릴까 걱정될 정도로 심장이 터질 듯 쿵쾅대고 호흡이 가빠졌다. 어느 날은 출근길에 갑자기 눈물이 또르륵 흐르더니 멈출 수가 없었다. 공부하기 싫어서 우는 철부지 중학생처럼.
물론, 간절히 원하던 목표를 성취한 적도 있고, 어려워만 보였던 과제를 잘 해결해 낸 적도 있다. 일을 향해 달리던 7년 여 시간이 결코 어둡고 허무하기만 한 날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던가. 남이 시키는 일만 죽어라 했다고 남을 탓할 것도 없다.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냈을 때 칭찬을 갈구한 건 나였으니까. 남들이 인정해주는 내 모습에 한껏 도취해 있었다. 일을 잘하는 나, 너무 멋있잖아! 남들이 역시 나밖에 없다고 말해주는 거, 너무 짜릿하잖아! 노동의 가치는 곧 임금이겠지만, 나는 내 노동의 가치를 그런 달콤한 말들로 대신했다.
내가 나에게 채워주지 못한 빈자리를 타인으로부터 충족하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엄격한 자아에게 ‘거봐, 사람들이 나 멋있대. 기특하지? 그러니까 너도 날 좀 사랑해줘.’라며 사랑을 갈구했다. 나란 인간은 워낙 야박해서, 칭찬은 아주 짧고, 채찍은 늘 길었다.
다시 일을 하게 될 때는, 좀 더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을까? 단지 ‘일’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를 갖길 바랄 뿐이다. 나의 노동과 열정이 나에게도 건강하게 기여할 수 있기를. 지금 나에게 제일 필요한 건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부터의 인정이란 걸, 달콤함에 취해 죽기 직전 깨달았다.
나 정말 멋있는 사람이잖아.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