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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 Jan 03. 2024

삶의 발명 : 가슴에 별처럼 박힌 이야기를 따라가자

2023년을 회고하며 읽은 책


내가 자꾸만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날 밤의 경이로움과 같은,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움과 마주치는 그 우연을 기대해서다
_삶의 발명, 정혜윤


2023년 한 해는 방황 그 자체였다. 홀로서기와 해외살이라는 두 가지의 큰 도전을 동시에 행했다. 디자인도 할 줄 알고, 그림도 그릴 줄 알고, 글도 쓸 줄 안다. 각각의 재능들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 어떤 재능을 어떤 형태로 실행해야 성과가 있을지 몰라서 정말 다양한 작업들을 했다. 와중에 불어 공부도 해야 했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어야 했다. 그러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하며 갑자기 화이트아웃이 되는 느낌이 종종 찾아왔다. 내 앞에 무언가 많이 놓여있긴 한데, 갑자기 눈 앞이 온통 하얗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느낌. 나는 대체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방황했던 걸까.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삶의 발명>, 정혜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뒤엉킨 방 안에 새로운 스위치가 탁 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모든 물음표들은 바로 ‘금방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프랑스 생활, 짧고 유한한 삶 속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로 향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좇는 이야기가 늘 모호했기에,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이것들이 모여 어떤 이야기로 연결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삶의 발명>은 작년 한 해 나의 추상적이고 막연했던 고민과 관념들을 언어화해 주었다. 독서가 주는 이점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경향신문



라디오 PD인 정혜윤 작가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직접 취재했거나 경험했던 에피소드들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하였다. 말하자면, 그의 마음에 별처럼 박힌 이야기들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포로감시원이었던 조선인 전범들이 자신의 무지를 후회하는 이야기를 비롯해 사고로 가족을 잃은 희생자 유가족들이 더 큰 공동체를 위해 싸우는 이야기, 제주도 바닷가로 돌아간 돌고래 춘삼이를 실제로 보고 심장이 뛰었던 이야기...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그리고 모든 생명이 공존하는 지구와 관계를 맺는 이야기들이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별처럼 박힌 이야기들의 초대를 받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삶이 향하는 목적지는 결코 홀로 만들어 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내가 앞으로 향해가야 할 길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발명이다. 



나는 나의 에너지의 대부분이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따라 사는 데서, 마음이 가는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나는 이렇게 타인의 이야기에서 에너지를 받는 것을 이야기의 초대라고 표현해 왔다. 이제는 이 이야기의 초대에 따라 길을 가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_삶의 발명, 정혜윤




Studio Pixel Artworks & Rupert Newman, Spaces In-Between, London




삶이 유한하기에 반짝이는 이야기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인간적인 것이다.
_밀란 쿤데라



프롤로그에는 이후 각 챕터들을 쉬지 않고 넘기게 해주는 강한 힘이 있었다. 작가는 이 책을 거의 완성한 상태에서 큰 사고를 당했고, 이를 닦고 옷 입는 동작까지 반복적으로 재활훈련을 해야 했다. 그는 삶이란 한 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몸소 깨달으며, 자신이 좇아야 하는 이야기, 공동체에 남겨야 할 이야기를 더 절실하게 찾고 싶어 졌던 것 같다. 삶의 모서리에 몰렸던 그의 개인적 이야기로 삶의 유한함을 먼저 상기시켜 준 덕분에, 모든 에피소드들이 흡인력이 있었고, 생동하듯 반짝거렸다.



내가 무엇을 누리든 그것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많은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또 한 번 주어졌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가, 변화하는 것이 중요한가. 나를 통해 묻는 사건이 일어난 것만 같다. _삶의 발명, 정혜윤


우리에게는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내가 머무는 공간, 만나는 사람들, 보고 느끼는 모든 순간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내 삶의 유한함에 대해서 어느 때보다 체감한다. 특히나 프랑스에서의 삶은 언제라도 끝날 수 있다. 그래서 더욱이 내 삶이 향하는 길이 반짝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부단히 수집한다. 



다행히 어떤 앎은 지도다. 새로운 앎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어야 가능성이 태어난다. _삶의 발명, 정혜윤


내가 파리로 온 이유였다, 새로운 앎. 내 삶을 바꾸고 싶었고,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롭게 알아야 했다. 나는 아는 것을 행하며, 알고 싶은 것을 향해 움직이니까.





행복할 때는,
내가 찾고 기다리던 이야기를
만나는 것


나는 늘 행복에 대해 말하기 어려웠다. 지금 행복한가? 언제 제일 행복한가?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정의를 내려야 한다. 하지만, 행복을 인식할수록 불행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의 자체를 회피해 왔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가볍고 명쾌한 해답을 얻었다. 행복할 때는 “내가 찾고 기다리던 이야기를 만나는 것". 나는 인생에서 기다리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리고, 종종 그런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충만해지곤 했었다. 종종이 아니라 자주. 전시를 볼 때, 예술가들의 삶을 접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이야기를 만난 것처럼, 내 안에 모든 희망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서 곧 터져버릴 것 같은 벅참을 느낀다. 이제부터 그런 순간들을 행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Paradise> Marc Chagall, 1961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나를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서 새로운 세계를 시작한다는 건, 그야말로 삶의 발명이다. 새로운 앎과 우연으로 가득 차있다.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뚜렷한 생계수단이 자리잡지 않은 상태에서 프리 선언을 했기에, 매일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화려한 삶은 결코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먹고사니즘을 절박하게 고민한 시기였다. 하루하루 자립을 넘어 존립의 문제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뭐 먹지? 언제까지 월세를 낼 수 있을까? 불안하게 흔들리는 앞날을 생각하면 자꾸만 시야가 좁아졌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가 나에게 경종을 울렸다. '너 여기에 무언가 이야기를 찾으러 온 거 아니냐'라고. 그는 내 안에 희미하게 존재했던 '이야기를 만드는 자아'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내 안에 그런 자아가 있음을 완벽히 깨달았다. 



나는 냉정하지만 따뜻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싫고 불편한 건 단호하게 거부하고 때로는 포기할 줄 알고,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더 많이 남겨두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세상을 보며 자주 슬퍼하고, 자주 분개한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를 넘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고 싶다. 비록 현실이 어둡더라도, 빛을 향해 가며, 변화를 꿈꾸고 싶다. 슬픔과 분노가 창작의 기재, 삶의 원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다른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보며 마음이 울렁이는 낭만을 꿈꿀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굳은 다짐을 했다. 기록을 통해 세상과 더 긴밀히 연결되어야겠다고. ‘반복과 기록’을 2024년의 가장 큰 목표로 잡았다. 작년 한 해는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느라 한 가지를 꾸준히 지속하지 못했다. (브런치도 그중 하나...) 계속해서 내 가슴에 별처럼 박혀 반짝이는 이야기들을 따라갈 것이다. 그리고 차곡차곡 기록하면서 내가 발명한 삶의 길을 가시화할 것이다. 한 가지 더 욕심이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싶다. 반복은 태도이자 진정성이다. 그리고 기록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행위이다. 내일 다시 태어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기록을 하지 않는다. 기록은 내일 다시 태어날 나에게 남겨두는 오늘의 유언이다. 현세대가 새롭게 태어날 세대에 남기는 유언이다. (내가 썼지만, 좀 멋있는 문장인 것 같아서, 최근에 다른 칼럼에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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