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그리고 삶
요즘 들어 잡념과 근심의 소란을 잠재워줄 여행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서울을 잠깐 떠나고 싶었고,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으며 쉬고 싶었다. 인파가 적고, 한적하고, 자연과 예술이 있는 곳. <뮤지엄 산>은 지금 나에게 최고의 비움이었다.
연차를 내고 평일 낮에 이곳을 찾았다. 주말에 가면 혹시나 사람이 붐비지는 않을까 싶어서 최대한 한적한 시간대에 방문했다. 서울에서 원주는 KTX로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가끔씩 마음이 소란할 때 가볍게 와도 좋을 듯하다.
<뮤지엄 산>을 가장 많이 찾는 이유는 아무래도 '제임스 터렐'의 작품 때문일 것이다. 미술에 관심이 없거나 '제임스 터렐'이라는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그의 작품은 눈과 온몸으로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나 또한 작가를 잘 알고 있진 못했지만, 그의 작품을 꼭 실제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여유롭게 방문해서 해설을 꼭 듣고 싶었다. 홈페이지에서 전시해설 프로그램을 찾아보니 큐레이터가 심도 있게 작품을 설명해주는 '인문학 프로그램'이 있었다. '플라톤의 동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서양미술사, 기독교'등을 기반으로 설명을 해준다니, 나에게는 너무나 흥미 있는 주제들이었기에, 바로 전화예약을 했다.
제일 먼저, 웰컴센터(프론트)에 도착하여 티켓 발권을 한다. 어디 어디를 보고 싶은지 묻길래, 전시관은 다 볼 거고, 명상도 하고 싶고, 인문학 프로그램도 예약하고 왔다고 하니, 그러면 1년 멤버십을 가입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개별로 티켓을 구매하면 00000원인데, 차라리 멤버십에 가입하시면 인문학 프로그램은 할인을 받을 수 있고요. 1년 동안은 언제든지 무료로 보실 수 있어요...' '자주 오셔요.' 요상하게 안내원의 이 말에 자주 와야겠다는 (아직 전시를 보지도 않았는데) 묘한 결심이 섰다. 원래 이런 영업도 넘어올 것 같은 사람에게 더 하기 마련인데, 안내원이 보기에도 내 눈에서 미술을 향한 열의(혹은 팔랑귀의 기운)가 넘쳐 보였나보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멤버십 15만 원 권을 결제하고 말았다. 대충 계산해보니 1년 안에 한 번만 더 와도 본전일 거라는 나름 합리적인 계산이 있었다! 너무 홀라당 넘어간 것 같은 기분도 동시에 들었지만, 뭐.
직원이 친절하게 시간대별로 루트를 짜준다. 명상관과 제임스 터렐관은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느 곳을 구경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지 지도에 적어주었다. 뮤지엄이 꽤 넓기 때문에 걷는 시간을 고려해서 움직여야 한다.
웰컴센터를 나오면 탁 트인 조각정원과 자작나무 산책로가 나온다. 비 온 다음날의 짙은 흙과 풀냄새로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이제야 '와, 잠시 서울을 떠나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조각정원은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부터 붉은 패랭이꽃이 들판을 가득 채운다고 한다(방문시기는 5월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꼭 와서 멤버십 본전을 뽑아야겠다.
뮤지엄 본관 앞에 다다르면 워터가든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한 Archway. 푸른 숲과 투명한 물 가운데 장엄한 자태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붉은색이 강렬하다. 사선으로 잘린 파이프 조각들이 엉켜있다. 거대한 철제 조형물이지만 정적인 공간에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주는 듯하다.
작가는 '알렉산더 리버만'. 붉은색 강철 조각과 기하학적인 패턴이 그의 시그니처라고 한다.
본관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상. 뒤쪽 유리창을 통해 역광을 받아 강렬한 실루엣이 시선을 끈다. 작은 원형 홀에는 백남준의 '커뮤니케이션 타워'가 외딴섬처럼 우두커니 서있다. 천장의 둥근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이곳은 정말 다양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한데 모여있는 희귀한 공간이다.
건물 안에서도 산책은 이어진다. 전체적으로 낮은 조도와 회색 벽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동굴 같기도 하다. 각 전시실 사이에 이어지는 긴 통로는 마치 '페르마타 [fermata]'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전 전시의 여운을 오랫동안 느끼고,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충분한 쉼을 갖게 해 준다.
페르마타[fermate]: 곡의 중간이나 마지막 등에서 박자의 운동을 잠시 늦추거나 멈추도록 지시하는 표
뮤지엄 산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 대학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4년 내내 가장 많이 보고, 듣고, 공부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이름 옆에는 자동으로 이런 해시태그가 꼭 붙어야 할 것 같다. #노출콘크리트 #모더니즘. 그리고 개인적으로 더 붙이고 싶은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빛. 물, 나무, 돌 등의 자연 물성을 잘 활용하지만, 그중에서도 '빛'을 가장 절묘하게 활용하는 건축가라고 생각한다. 학교 과제를 하면서 '빛의 교회'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업했던 기억이 난다. 교회 벽 정면에 뚫린 커다란 십자 모양의 창을 통해 강렬한 빛이 들어오는데, 그 장면이 상당히 비현실적일 정도로 경건하다. 마치 금방이라도 십자가가 열리며 새로운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안도 다다오의 회색에는 여유와 사색의 시간이 담겨 있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긴 통로, 커다란 창으로 드리우는 빛, 탁 트이거나 좁거나 높은 곳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방향성이 이 공간의 언어였다. 이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는 침묵이고, 행위는 걷는 것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날카로운 직선과 우아하게 그려진 곡선, 그리고 사각형, 삼각형, 원형으로 이루어진 미로 속에 있는 듯하다. 단순한 도형들이 자유로우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다. 그의 건축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삼각코트. 건물 중간에 하늘을 향해 뻥 뚫린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는 돌뿐이다. 가운데에 앉아서 벽면의 사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삼각형 프레임 안의 하늘을 바라본다. 만약 하늘에서 이곳을 내려다본다면, 나는 지금 삼각형 안의 중심점일 것이다. 제임스 터렐관에서도 이런 비슷한 공간이 또 있는데, 뮤지엄 산에서는 하늘을 볼 일이 많아진다. 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아주 작은 자연의 움직임에도 미묘하게 반응하는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한국미술의 산책, 추상화' 전시실에서 반가운 작가들을 만났다. '김환기' 화백의 작품은 이 넓은 공간을 압도한다. 가까이 앉아서 그림멍(?)을 때렸다가, 2층 멀리에서도 보았다가, 다시 앞을 서성이며 보았다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점들이 불규칙적으로 번져있는 모습이 그냥 나의 하루하루 같다.
또 다른 전시실의 '기세와 여운展'. 김창열, 김환기, 윤형근, 이강소, 이우환 등의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서예에서 파생된 선들이 갖는 에너지와 사유적 세계를 보여준다.
"역시 붓을 써야겠어. 동양 사람의 체질은 역시 모필이 맞고 거기서 미묘감이 오는 것 같아."
- 김환기, 뉴욕 시절(1963-1974)일기 중
선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감한 붓 터치에서 힘이 느껴졌다. 여백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느껴졌다.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은 정말이지 극도로 사실적이다. 그는 물방울의 가장 큰 특징인 존재의 일시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존재하면서도 곧 소멸해버리고 마는 물방울을 그림으로써 소멸과 사라짐을 동시에 그린 것이다. 가장 변형되고 사라지기 쉬운 물성의 매우 짧은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본관의 전시를 보고 나오면 스톤가든이 이어진다. 보이는 그대로 고분처럼 생긴 돔들이 이 공원의 지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역시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각 작품에도 이름이 있는데, 한국의 팔도 지명이 적혀있다. 강원도, 전라남도, 평안북도... 한국의 지나간 역사와 숨결들이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것만 같다.
비슷한 돔 형태로 생겼지만 실내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바로 '명상관'이다. 둥근 돔 형태이지만, 가운데에 기다란 유리창이 있다. 명상 프로그램을 예약하고 정해진 시간에 입장할 수 있다.
이 안에서 40분간 명상을 했다. 천장의 길고 가느다란 창에서 햇빛이 차분하게 스며들어온다. 무덤 속 같지만, 갇힌 것도 뚫린 것도 아닌 상태에서 정말 숨만 쉬었다. 진행자분이 편안한 기분이 들도록 명상의 시작을 도와주며, 가볍게 아로마 오일을 발라주시기도 한다. 싱잉볼 연주를 들으며 눈을 감고 눕는다. 잡생각이 불현듯 떠올라도 오로지 호흡에만 집중하고, 모든 것을 다 흘려보내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휴식이 필요하여 방문한 사람이라면 꼭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하길 추천한다.
공간의 무한성을 느낄 수 있는 Ganzfeld. 아주 천천히 색상이 변한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이었다가, 푸른 하늘이었다가, 노을 녘이 되기도 한다. 좌우 시야를 가리고 벽을 향해 걷다 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무한한 공간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제임스 터렐은 이렇게 인간의 뇌를 속이는 착시 현상을 자주 활용한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에 의존하게 되는 경험, Wedgeworks. 벽의 난간을 잡고 아주 깜깜한 동굴로 천천히 들어가면 네모난 프레임이 나온다. 의자에 앉아 이 프레임을 계속 보고 있다 보면 사람의 눈은 어둠에 점점 적응하여 빛이 더 밝아지고 옆사람도 보이기 시작한다. 프레임 안에는 뿌연 안개가 있는 것 같지만, 손을 뻗어 넣어보면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빛이 만들어내는 착시이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Skyspace. 타원형의 공간의 천장에 타원형의 둥근 창. 낮에는 창이 열려있어 하늘을 볼 수 있다. 저녁에는 창을 닫고 컬러가 변하는 색다른 관람을 할 수 있다. 둥근 창을 보고 있으면 우물 안에 갇혀서 바깥세상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작은 구멍을 통해 인간을 보고 있는 거대한 괴물의 눈동자 같기도 하다. 어린 왕자가 그려준 구멍 뚫린 상자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장 숭고한 하늘에 맞닿게 되는 곳, Horizon room. 마치 제단과 같은 계단 위에 네모난 창이 뚫려있다. 동굴에 갇혀있다가 비로소 외부 세계로 한 발짝 나아가는 것 같다. 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탁 트인 야외 테라스가 나온다. 작품 속 공간에 심취해 있다 보면, 잠시 어느 곳이 현실세계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제임스 터렐관은 역시 가장 강렬한 하이라이트였다. 2번 관람했는데, 첫 번째는 40분 정도로 기본 가이드만 들었고, 두 번째는 2시간가량 인문학 해설을 들었다. 첫 번째 관람에서는 빛과 색을 상당히 창조적으로 사용한 공간 예술로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 미지의 세계에 맞닿은 듯한 기분이었다. 유한한 공간 안에서 이 세계의 무한함을 느낀 것만 같았다. 인문학 해설에서는 플라톤의 동굴부터 어린 왕자까지 아주 방대한 배경지식들의 폭격을 맞았는데, 얼마나 많은 함의가 담겨있는지 깨달으며 놀라울 따름이었다. 동굴 안에 스며들어오는 빛으로부터 더 큰 세계의 존재를 유추하며, 내 존재의 한없이 작음과 유한함을 새삼 의식하게 되었다. 현실로 돌아가면 분명 다시 버거워질 것들이지만 모든 고민들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아주 잠시였지만.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작품과 건축물을 감상하며, 내면을 가득 채우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잠시 지나쳐간 환영 같은 빛들, 조용한 사색과 침묵, 그 여정의 끝에는 무한한 자연이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텅 비워진 나 자신.
1시쯤 방문하여 마감시간까지 거의 6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구경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뮤지엄 산. 다음엔 더 여유 있게(?) 오픈 시간에 맞춰 와야겠다.
그리고 인문학 프로그램은 한 번 더 듣고 싶을 만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예약 필수)
http://www.museumsan.org/museumsan/james/james.jsp?m=3&s=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