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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 Apr 23. 2021

FEEL LOST 최랄라 사진전 : 상실의 색과 향

예술 그리고 삶


상실감에 젖은 뒷모습을 위로하듯
짙게 채우는 색과 향,
공간 그 자체




자이언티의 몽롱하면서도 강렬한 붉은빛의 앨범 재킷이었던 것 같다. 사진작가 '최랄라'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색감의 작품이다. 그의 또 다른 사진을 우연히 접하게 된다면, '예전에 이런 분위기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라며 바로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사진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색을 처음 본 것만 같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나는 '그가 담아낸' 붉은색과 파란색을 좋아한다. 맥없이 순수하거나 청량하지 않은, 오히려 탁하고 뿌연 그의 색이 좋다. 내가 원체 해맑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상의 색들은 그를 통해 감정을 입고, 우리의 새로운 감각을 깨워준다.


그가 정확히 어떤 예술사조에서 모티브를 얻는지는 모르겠으나, 익숙한 듯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붉은 입술에 강렬한 배경, 하지만 무언가 상실한 듯한 표정 혹은 뒷모습은 90년대 홍콩영화의 퇴폐적인 미장센이 떠오른다. 섬세하고 정교한 선과 결은 사진인 듯 그림인 듯 오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 16세기 르네상스 회화 같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사진들 역시 지난 작품들과 결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 특유의 느낌을 유지하되 새로운 콘텐츠로 찾아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방황해도 괜찮아
It's OK to feel lost


<FEEL LOST>라는 이번 개인전시는 작가가 3년여간의 방황의 흔적들을 공감각적으로 담아낸 전시로, 관람객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선사하고자 기획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컨셉인 '공감각'은 웹이나 모바일로도 충분히 찾아보면 볼 수 있는 사진 작품들이지만, 꼭 직접 가서 보기를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전시이지만 시각적 매개체만이 아니라 후각과 청각까지 자극하여 온 몸으로 메시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한 가지 더하여 공간의 주는 기운 또한 작품의 미학을 훨씬 잘 드러내 주었는데, 이는 말하자면 '육감'을 건드리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였다.




첫 번째, 후각으로 느끼는 위로


이곳에서 상실을 위로해주는 향은 '바이레도(BYREDO)'의 '믹스드 이모션(MIXED EMOTIONS)'이다. 바이레도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전시장 본관 입구 쪽에 향수를 컨셉 디스플레이해두었으며, 공간 전체를 이 향으로 가득 메웠다.


'믹스드 이모션'은 처음 딱 맡았을 땐, 달큰하면서도 꽤 씁쓸하게 쏘는 향이 코 끝을 자극한다. 하지만 공간 안에 계속 머무르다 보면 톡 쏘는 느낌에 적응이 되서인지 꽤 편안한 느낌을 준다.


믹스드 이모션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불안정한 현실과 오르막과 내리막을 끊임없이 지나치는 격동적인 현시대를 반영한 중성적인 향기입니다. 믹스드 이모션은 이분법과 부조화에 대한 탐험이며,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의 결합으로 향기의 대조의 화합을 이뤄냅니다.

탑 노트: 마테, 블랙 커런트
미들 노트:  실론 블랙 티, 바이올렛 리프
베이스 노트: 버치 우드, 파피루스


나중에 제품을 검색해보니 이러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었으며, 시간에 따라 발향이 꽤 많이 바뀌며 잔향이 오래 남는다는 평이 많았다. 탑노트의 마테, 블랙 커런트가 스파이시한 인상을 주며, 미들 노트의 실론 블랙 티와 바이올렛 리프가 편안한 달콤함을, 그리고 베이스 노트의 버치 우드와 파피루스가 깊은 자연을 느끼게 해주는 듯하다. 격동적이고 불안정함 속에서 향기로 위로를 전한다는 의미로, 이번 전시의 메시지와 잘 어울린다. 처음 전시 티켓을 수령할 때 함께 시향지를 나눠주는데, 집에 돌아오니 온 방 안에 그윽한 잔향 남아서 전시의 여운을 더 오래 느끼고 있는 듯하다. 밤에 달큰한 잔향을 맡으니 기분이 꽤 몽롱해진다.


2층에는 다락방처럼 생긴 조그만 공간이 있는데, 여기에는 '바이레도'의 '버닝 로즈(BURNING ROSE)' 캔들로 다른 향을 채우고 있다. 2층으로 올라선 순간 갑자기 플로럴 하면서도 훨씬 묵직한 향으로 확 바뀌어서 안내원에게 '여긴 다른 향수를 뿌렸나요?'라고 물어보려다가 한쪽에 이렇게 캔들이 피워진 것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


her 시리즈

누군가의 뒷모습들. 그들이 응시하고 있는, 자유롭게 펼쳐진 무언의 몸짓이 향하는 어딘가로 우리의 시선도 함께 따라가게 된다. 다락방처럼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과 잘 어울린다. 캔들의 향처럼 몽환적이고 은밀한 느낌이 든다.




두 번째, 시각으로 느끼는 위로


대화 시리즈

본간 1층에 가장 거대하게 전시되어 있는 <대화>라는 작품이다. 너무 거대해서 어디로 이동하든 계속해서 이 작품을 마주치게 된다. 나에게는 '최랄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인 짙은 붉은색이 역시나 강렬하게 시선을 압도한다. 제목은 <대화>이지만, 보다시피 두 의자 사이에는 붉은 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 벽에는 자신의 그림자만이 비칠 뿐이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고개를 들었을 땐 반대편엔 아무도 없고 붉은 벽에 자신의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다. 다시 대칭을 이룬 듯하지만 의자 위에 잔상만 남아 있으며 그림자 또한 흐릿해진다. 붉은 벽은 단절일까, 투영일까. 대칭과 비대칭, 명과 암, 선명함과 흐릿함, 형상과 잔상. 이 시리즈에서는 대조되는 여러 개의 단어들이 떠오른다. 작가 본인이 3년여간 방황하며 했던 내면의 대화를 담아낸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공간 안의 곧게 뻗은 선들이 참 우아하다. 절제된 공간의 선들이 사진 속 피사체들이 만드는 곡선들을 더 돋보이게 해 준다. 여행하는 듯 전시장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아! 이 위치에 이 그림이!' 하며 감탄하게 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바로 그런 위치에서 발견하였다. 작품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놓여 있는 위치가 그 작품을 더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her 1

바로 <her> 시리즈의 첫 시작인 이 작품이다. 작가의 파란색은 항상 푸르다고 표현하기 애매하다고 느꼈다. 원래 파란색 하면 떠오르는 시원하고 청량함 대신 매우 짙고, 어둡고, 꽉 차있는 느낌이 든다. 마치 붉은색의 변주인 것만 같다. 이 작품이 바로 그런 파란색이었다. 비행하듯 두 팔을 곧게 펼치고 약간 사선으로 기울어진 몸의 방향이 자유를 갈망하는 듯 보인다. 역시 마냥 시원하지 않은 파란색이기에, 저 파랑이 하늘 일지 물 속일지 벽일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보는 이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다.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복도 입구에 이 작품이 제일 먼저 보인다. 저 난간과 그녀의 곧게 디딘 다리의 위치가 너무 기가 막히게 절묘하지 않은가. 마치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서서 걷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녀는 난간 끝에서 어딘가를 향해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her 시리즈

흐느적거리는 몸짓,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모습들은 과하게 힘이 들어간 요즘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만 같다.




다른 2층 구역은 작업실처럼 연출해놓았다. '검프린트'라는 기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의 전반적인 작품들이 회화적으로 보이게 하는 바로 그 기법이라고 한다. 그는 사진을 촬영한 후에 색감과 질감을 만드는 후작업들이 진정한 사진 작업이라고 말한다. 1층에 조그만 영상실에서 작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예술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데, 꼭 놓치지 않고 보길 권한다.



마지막, 공간에서 느끼는 위로


용산동 갈월동에 위치한 이 공간은 원래 60년 된 교회 건물을 개조한 갤러리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순백의 순수함과 더불어 성스러움이 느껴진다. 유럽의 모던 건축양식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것 같다. 단순한 직선과 사각형, 큼직한 곡선과 아치. 근대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와 '롱샹성당(Ronchamp chapel)'이 언뜻 떠오르기도 한다. 이 건축물들도 그렇지만, 이 공간도 흰 시멘트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길고 높은 나선형의 벽에 있으면 나를 온전히 감싸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며, 탁 트인 공간에서는 대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기 좋아 보인다. 원래 날씨가 좋으면 내부에도 기다란 창을 통해 햇빛이 촤- 비추면서 훨씬 더 따스해 보였을 텐데, 안타깝게도 내가 방문한 날은 흐린 날씨로 인해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건물의 외관은 소박하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희옇고 깨끗한 파사드와 탁 트인 창 너머로 느껴지는 빛에 왠지 모를 경건함을 느끼게 된다.


곳곳에 가지런히 자리한 창문들은 바깥 풍경을 그림처럼 담아내는 또 다른 액자와도 같다. 사진을 보다가도 이내 창 밖으로 시선을 빼앗기곤 하는데, 최근 들어 이러한 여유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싶다.


그리고, 작가가 즐겨 듣던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이 흘러나와 색과 향, 그리고 이 공간에 스며들어 작가의 감정을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상실, 그 끝에서 포근하게 느껴지는 위로



상실에 대하여 말하지만, 어쩐지 담담하고 조용한 위로의 대답을 듣고   같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단계  다운된 작가의 색감은 여전히  마음에 짙게 스며든다. 여러  쌓아 올린 회화 같은 질감 때문인지 그의 사진 속에는 공기가 채워져 있다.


아마도 이 공간에 나 혼자만 있었다면,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사진을 멍하니 보다 보면 깊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색에 빠져들 것만 같았고, 울컥해지곤 했다. 내 삶에서 느껴지는 이 상실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씁쓸하게 곱씹게 된다. 삶의 의미 혹은 재미, 사랑?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부질 없다고 느껴져서 내가 스스로 버리고 온 감정들일까. 작가의 색과 향이 내 상실의 빈 자리를 잠시 채우고 간 듯하다.




<FEEL LOST> 최랄라 사진전

2021.04.02(금) ~ 05.01(토)

사전예약 필수
https://booking.naver.com/booking/12/bizes/50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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