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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에 Jun 30. 2023

어쩌다 웹소설 작가

얼떨결에 장래희망 성취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다.


글에 대한 흥미를 깨달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매일 일기를 써야하지만, 때로는 동시로도 대체가 가능했다. 그래서 일기가 쓰기 싫었던 날 동시를 적어서 냈고,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가 쓴 동시를 보시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며 칭찬을 해주셨었다. 그 칭찬 한마디에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일에 돌아온 뜻밖의 칭찬이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이후로 내가 글에 흥미를 가지고 써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일장도 나가 보고, 장래 희망에는 작가라고 써놓기도 했었다. 기억이 맞다면 초등학교 고학년 내내 장래희망을 작가라고 적었던 것 같다.


물론 다른 길을 꿈꾸기도 했다. 격동의 사춘기를 지나며 모 가수에 푹 빠졌던 나는 무대디자이너가 되고 싶기도 했고, 연예계와 조금이라도 밀접한 광고인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다시 작가를 마음에 품었다.


고등학교 때는 입시가 장래희망에 가까워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어국문과나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었다. 그것도 웬만하면 수도권으로. 그러나 성적이 걸림돌이었다. 국어 과목은 늘 상위권이었으나 나머지는 중간즈음을 맴돌았기에 수도권에서 괜찮다는 대학을 지원하기에는 모자랐다. 그 점을 보완하려 내가 택한 방법은 바로 문학동아리에 입부하는 것이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문학동아리 부원들만 외부 백일장에 참가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규모가 큰 대회들은 평일에 수업을 빠지고 가야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런 제한을 걸어둔 듯했다. 동아리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선택권도 없었다. 무어라도 가산점을 만들어 보려면 동아리에 가입하는 수밖에.


고등학교 동아리일 뿐이지만 나름의 테스트도 있었다. 간단한 자기 소개와 직접 쓴 글을 제출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끝에 가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비록 백일장에 나가려고 가입했다가 난데없는 선후배 문화로 많은 당황을 했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처음으로 나갔던 전국 단위의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도 단위의 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고, 꽤 여러 번 크고 작은 상장과 부상을 받았다.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면 당초 목표대로 가산점을 적용받기에 적절한 수상내역은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입시는 가산점 없이 진행했다. 당시 여러모로 부모님과의 의견 차가 있었고, 상황이 따라주는 대로 하다 보니 국문과나 문창과에는 가지 못했다. 대학 진학 이후 취업 또한 글을 쓰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고, 그렇게 직업 글쓰기는 나와 먼 일이 되어갔다.


그래도 취미로는 꾸준히 썼다. 지금 와서 생각이지만, 취미였던 시절이 있기에 내가 지금까지 글을 써올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또, 전혀 다른 일을 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계속 꿀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회사에 다니다가 지치고 힘들 때면 꼭 한 번씩 작가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나곤 했으니까.


처음에는 막연히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열리는 공모전 모집 요강들도 미리 훑어보곤 했다. 하지만 실컷 다 알아보고 나면 막상 쓸 엄두가 안 났다. 책을 보거나 사는 건 좋아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출간되는 진지한 글들을 내가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웹소설이 부흥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소설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그쪽이 내게 더 가능성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막연히 공모전 요강을 살필 때보다 훨씬 진지하게 소설을 써볼 마음을 갖게 됐다. 마침 퇴사 시점과도 잘 맞아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소한의 생활비만 벌고 글에 매진해볼 결심까지도 세웠더랬다.


안타깝게도 첫 번째 결심은 실패했다. 타지에 나와 월세로 자취를 하는 나에게 아르바이트로 최소 생활비를 버는 건 무리였다. 이래저래 계산해보면 박봉이라도 월급 받는 직장인이 나았다. 결국 그때의 다짐은 캐릭터 설정만 떠올려보다가 재취업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두 번째 결심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혼자서 글을 올리던 블로그에서 우연히 출판 제의를 받았다. 그때도 취미로 글을 쓰고 있던 중이어서 출판은 전혀 고려해보지 않았었는데, 불현듯 들어온 제안이 내 맘을 흔들어놨다. 그러나 얼마 가지는 못했다. 조금은 설레는 맘으로 받아본 가계약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독소조항 천지였다. 출판 계약서는 처음 보는데도 무언가 이상했다. 그래도 이왕 들어온 제안인데 아쉬워서 수정을 요구해보기는 했다. 모호한 부분을 조금 더 명료하게 표현해달라든가, 99:1의 불리한 조건을 60:40 정도로 바꿔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식이었다. 덜컥 계약했다간 노예가 될 법한 계약서이기에 꽤 많은 부분에 질문을 하고 확인을 요청했더랬다.


결과는? 거절이었다. 수두룩한 질의와 요청 사항 중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하는 수 없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계약서인 걸 알면서도 사인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비록 두근대던 계약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내 마음은 여전히 설렜다. 변방에서 혼자 취미로 글을 쓰던 나를 찾아내서 출판 제안을 주었지 않나. 그렇다면 내게도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웹소설 플랫폼에 접속해 출판사 정보를 모으고, 출판사 블로그 등을 살펴보며 시장 조사에 나섰다. 그뿐일까. 정말 혹하는 마음으로 스토리와 캐릭터를 짜고 한층 더 진지하게 기획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은 안 했다. 생각지 못한 제안에 바람이 든 것. 딱 그정도였다. 당시 다니던 직장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막연한 꿈은 여전하지만, 냉정하게는 오로지 작가로 먹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족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으면서 굳이 작가로 투잡을 하며 힘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째 결심도 물건너 갔다.


세 번째 결심은 그로부터 또 2년 뒤였다. 그사이에 나한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 만족스러워하던 직장을 그만뒀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으며, 회사가 아닌 프리랜서로 재택근무를 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프리랜서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수입이 불안정하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먹고 살 정도로는 벌이가 됐었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업계가 흔들리더니 점차 수입이 줄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그때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내 선택은 이만 프리랜서 일을 접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분간 좀 쉬면서 생각해보기로 하며 일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정말 미래가 막막해졌을 때,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데 도움을 받고자 국비 지원으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디자이너로 새 진로를 찾으려 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힘드니 취업 연계의 희망을 품고 학원에 등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학원 수업을 듣던 그 무렵, 웹소설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지인의 권유였다. 아마 그때도 내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면 또 흐지부지 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학원을 수료한 다음에도 취업이 된다는 보장이 없는 막막한 상태였다. 어디라도 한 다리 걸쳐놓아야 마음이 놓일 상황이었던 거다.


그렇기에 한번 해보자고 마음 먹으면서도 사실 아주 진지한 마음은 아니었다. 나는 디자이너가 되려고 수업을 듣고 있지만, 그밖의 시간에 글을 쓰면 되니까. 내가 디자이너로 취업을 하더라도 부업으로 짬짬이 글을 써서 부수입을 늘리면 좋겠다는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그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던 글이 혹독한 과정을 거쳐, 정말 나의 필명으로 출간이 되어버렸다. 어릴 때부터의 꿈을 돌고 돌아 비로소 웹소설이라는 분야에서 작가라는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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