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란 직업]
내 아이들은 병설 유치원에 다닌다. 처음엔 어려운 추첨에 당첨되어 기뻤고 지금은 교육방침이나 교사의 질(능력 측면보다 공무원과 근로자의 근무여건과 처우에서 오는 차이)과 교육 환경에 만족하고 지금까지도 그 만족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병설의 유일한 단점(?)인 긴 방학은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시간임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지친다.
여기서 ‘나도 모르게’ 가 문제다. 삼시세끼 밥을 차리고 치우고를 반복한다. 어쩌다 보면 설거지하다 젖은 손으로 아이의 뒤처리를 해결해줘야 할 경우도 생긴다. 집안일과 아이의 요구가 끝이 없다. 하루 종일 “엄마!”란 말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 늘 들리는 소리라 자연스럽게 아이의 부름을 무시한다. 게다가 집안일을 마치고 방학 기간을 이용해 모자란 학습(아이가 7세 중반인데 아직 한글을 깨치지 못했다.)을 시키고 시계를 보면 아직 정오다. 다시 밥해야 할 시간이 왔으며 하루는 아직 길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지만 몸과 마음은 저 것이 자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제발 나를 부르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 남편이 퇴근해서 또 나를 부른다. 남편은 지쳐있는 나에게 조금 쉬라고 얘기하려던 참이었는데 난 대뜸 “제발 나 좀 부르지 말아줄래?”라고 차갑게 말하고 만다. 남편의 의도를 듣고 미안한 마음에 바로 사과를 해도 지침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그런 의도더라도 부르지 않아주는 게 더 고맙다. 주변 사람은 나의 상태를 살피는데 난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니, 알 겨를이 없다. 해야 할 일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학이니 당연히 힘들지,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겨우 살림이나 하면서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과 지내는 건데 뭐가 힘이 든다고.’ 나의 감정을 읽지 않고 다그치기만 한다. 이것이 나와 아이의 긴 방학이다.
그러다 어느 날, 혼자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글을 어느 밴드에 남겼다. 현재 여성학을 공부하는 선배가 “현주 씨, 격무에 시달리는구나!”라고 댓글을 남겼다. 격무란 단어가 나에게 충격과 위로를 한 번에 건넸다. 충격은 살림과 육아를 격무란 단어에 접근조차 못 시킬 정도로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 위로는 내가 격무에 지쳤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찾아왔다. 나의 가치 기준은 무엇이기에 살림이 격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배제한 걸까?
살림을 하는 것을 흔히 “집에서 놀아요!”라고 표현하곤 한다. ‘놀다’는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 일정한 직업이 없이 지내는 것. 어떤 일을 하다 일정 기간 쉬는 것”을 의미한다. 육아문제로 직장을 그만둘 때 “이제 집에서 노니 좋겠네.”, “쉬니까 좋아?”란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직장을 그만둠’을 ‘노는 것’과 동의어로 해석해버렸다. 막상 살림과 육아를 해보니 사람(남편이든 자식이든)을 잘 먹이고 거두고 키워서 최소의 경제단위를 구성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적 자원의 밑천을 만드는 충분한 생산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의 인정을 못 받는다는 이유로 이 중요한 활동을 ‘논다’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이런 말을 듣는 여성들 대부분이 집에서 논다는 표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전업주부는 가정이란 단위 안에서 돈을 버는 일 외의 나머지 모든 몫을 담당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을 겪는다. 일상의 의식주를 유지하고 양육부담을 담당해내느라 하루 중 혼자만의 시간이 없다. 적정한 보상도 없고, 심지어 ‘가치 없는 일’로 규정된다. 『82년생 김지영』을 집필한 조남주 작가는 살림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이 일의 주체인 여성마저 사회에서 요구한 것에 의해 만들어낸 시선과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격무가 노는 일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아내, 엄마, 며느리 역할, 자녀 학업 관리, 가족 감정 관리, 시댁 및 친정 관계 관리, 24시간 대기조. 이 하나라도 잘 안되면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책임을 묻도록 교육받아 왔고 그래서 타인도 당당하게 책임을 묻는다.
다음과 같은 구인 광고가 있다고 하자! “일정한 출퇴근 시간이 없습니다, 휴가도 물론 없지요, 우리는 멀티풀(multiful)한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반복된 일을 짜증 없이 계속해야 하며,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아이의 요구에 즉각 응대해야 합니다. 창틀의 먼지 닦기나 걸레 빨기 등 시킨 사람이 없는 일도 알아서 해야 하며 못을 박거나 짐을 옮기는 강도 높은 일도 가끔 발생하니 힘이 키우시기 바라며 마지막으로, ‘내게 맞지 않는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발생합니다만 한번 시작하시면 절대로 중간에 그만둘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숙지하신 후 지원 바랍니다. 아! 그리고 중요한 사실, 적절한 임금을 산정할 기준도, 지불할 주체도 없어 무급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이의 자람과 남편의 사회생활로 충분한 보상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당신이라면 지원하겠는가!
사회가 정한 기준에 의해 어떠한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다 보면 나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우를 범한다. 가치 없는 일로 여기고 있는 기존 생각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진정 가치가 없는 일인지,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그 구분이 나의 자존감을 살리는 길이다. 또한 가치를 인정 받든, 받지 못하든, 받을 수 없든지 간에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분노하지만) 스스로 내 직업의 가치를 후려 깎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회봉사자나 기부자만큼 훌륭한 마인드를 갖춰야 하는 ‘숭고한 직업’이며 그 힘든 직업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직업의 관점으로 봐야 내가 야근을 하고 출퇴근이 없지만 마음으로 적절한 보상을 받고 있는지(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는지) 가늠할 수 있고, 그것이 나를 지치지 않게 하는 힘이 된다. 출퇴근이 없다는 점이 불만이라면 가족과 의논하여 나의 '휴일'을 정해야 한다. 작은 실천이 나를 살린다. 전업주부는 특히 가족들과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 그들에게 나의 일이 격무임을 이해시키는 것이 때론 더 피곤하기도 하지만 말도 없이 마냥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다. 적어도 전업주부는 다른 직업과 달리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나. 사랑하는 만큼 대화하길 바란다.
생각보다 우리 주위에는 ‘내 가족에게 있어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이상과 책임이 높은 주부들이 많다. 이 이상을 달성해내느라 지치고 힘들어도 자각하지 못하고, 책임감으로 남에게 부탁하지 못한다. 전업주부가 가지는 이상과 책임감은 당사자 스스로 정한 것일까? 사회가 바라고 정한 대로 끌려가는 것일까? ‘쉼’을 ‘죄’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자. 그 이상과 책임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사회가 원하지만 나와 합의할 만큼의 것인지, 아니면 지금 당장은 깨기 힘들어도 기한을 정할 것인지 점검해보자. 사회가 정해진 기준으로 살다 보면 열정과 의지보다 책임감이나 죄책감으로 살기 쉽다. 그 일을 해내거나 버티는 것은 책임감에 의해서, 해내지 못하면 죄책감에 괴롭다. 인생이 수동태가 된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있어 전업주부도 차악의 선택이었을 텐데 지금 이곳에서 내가 ‘살아내고 있는 삶’마저 수동이면 전업주부는 영원히 억울한 직업으로 남아 결국 그 어떤 누구에게도 (숭고한) 선택을 받지 못할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