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공부』(엄기호, 따비, 2017)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공부는 왜 하는 거냐고 물었다. 얼버무리다 결국 ‘바보’가 되고 싶으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협박을 하고 말았다. 『공부 공부』(엄기호, 따비, 2017)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아이의 물음에 대해 솔직히 모른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자면 “지혜 중의 지혜는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무지 중의 무지는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p.147) 모르기 때문에 ‘공부’에 대해 공부하는 지혜로운 엄마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책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나와 같은 무지한 사람을 위해 공부의 이유, 목적, 더불어 공부를 통한 기쁨을 소개한다.
저자는 대한민국 공부계의 ‘유발 하라리’다. 그가 『사피엔스』에서 인류 역사를 혁명 기점으로 분류한 것과 같이 이 책은 대한민국 ‘공부 문화’가 달라진 맥을 정확히 짚어낸다. 저자는 ‘공부 목적’이 변화된 시기를 3단계로 나눈다. 공부를 하면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1990년대 이전, 중산층의 확장으로 ‘자아실현’을 위해 공부하고 소비 자본주의 영향을 받은 IMF 기점까지, 그리고 대학 진학률이 상승한 1970년대 생이 부모가 된 시점이다.
나의 관심은 ‘공부할 이유가 사라진 시대’에 사는 오늘날의 모습이다. 지금은 대학을 통해 신분상승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자식의 실력은 부모 경제력의 지표가 된 지 오래다. ‘서울대'는 공부만 잘하면 들어가던 예전의 서울대가 아니다.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을 계산하며 부러움과 열패감이 동시에 따른다.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1970년대 생 진보적인 부모도 자식에게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말하지만 ‘하고 싶은’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기를 갈망한다. ‘행복’ 뒤에 감춘 ‘성공’을 자식이 모를 리 없다. 그들은 삶에 대해 매우 불안해한다.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중산층 부모 밑에 자란 아이들은 앞으로 부모보다 잘 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자기가 부모덕에 누리고 있는 삶의 수준에 만족한다. 그런데 이 정도 생활수준을 자기가 미래에도 누릴 수 있을지는 불안하다. 생존 주의 시대에 ‘생존’의 의미는, 이들에게 부모 밑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생활수준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이다.”(p.100) ‘계급 재생산’을 위해 부모가 자식의 모든 일정을 관리하고, 공부 이외의 것은 부모가 모두 알아서 해주고, 집안의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자식 교육에 쏟는 이유인 것이다.
저자는 공부의 모든 효용이 끝났다고 말한다. 공부를 통한 ‘신분상승’과 ‘자아실현’의 기능은 지금의 ‘성공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지 못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이유’도 성공, 하지 않는 ‘대가’ 또한 성공이다.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다른 적성을 발휘해 해당 분야에서의 ‘또 다른 성공’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성공만 한다면 공부하지 않는 것이 허용되는 조건부적 시스템은 누구도 지키기 어려운 수준의 법규를 지정해 모든 시민을 범죄인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개인의 삶은 실패를 거듭해 결국 황폐해질 것이다. ‘성공’이란 패를 내려놓지 않는 이상 희망은 없다. 내가 바라는 성공이 행복이란 단어로 둔갑해 내 자식을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암담한 현실에 제시한 해결책은 결국 내 삶을 우선 순위에 놓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공부가 우선이다. 저자는 공부가 ‘성공’, ‘욕망’, ‘사회 기준’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그러기 위해 공부에 대한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자아는 ‘실현’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 된다.”(p.180) 자신의 한계, 흥미, 호기심을 발견해 나아가는 것, 배운 것에 대해 충분히 익힘의 시간을 들이는 것, 경지에 도달해 쾌감을 느끼는 것, 기예로 발전해 그것이 자신과 한 몸이 되어 능수능란하게 발휘되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느낄 것이다.
“자유란 멋대로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다루는 도구들의 결을 알고 흐름을 타면서 내 몸의 일부처럼 이질감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다.”(p.230) 자유를 마음껏 향유할 줄 알면 비로소 그것이 영속성을 발휘해 관계의 디딤돌을 내어 준다는 것, 그 디딤돌을 딛고 자신에 대한 발견을 이어 나가다 보면 조각나 있던 지식이 시간에 꿰여 퍼즐이 완성된다. 그리하여 공부는 삶의 서사시며, ‘성공 스토리’가 아닌 ‘성장 스토리’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공부의 의미를 일깨우는 좋은 안내자다. 공부의 기쁨을 향유할 마음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혼자’는 자신이 없다. 이러한 질문에 저자는 에필로그로 답을 이어간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처한 이런 공통의 운명에 관해 알아야 하고, 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p.282) 사회에 저항하는 것도 제도권 밖에 있는 어른의 몫이다. 제도화된 환경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공부의 기예를 발휘하라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다. 이 책에서의 공부는 어른을 위한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 답을 주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진 유일한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