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다.
많은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이 진부하고 세속적인 현대의 대표적 잔흔인 결혼식을 생략할 것이라고 믿는 듯하였다. 워낙 다양한 이벤트들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우리였기에 오히려 우리가 혼인신고 후 2년이나 흘러 이제야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고 청첩장을 돌리니 되려 의아해했다.
그랬다. 우리도 결혼식은 처음엔 생략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만 좋으면 되지…라고 생각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총 5년을 함께하는 동안 세 번의 결혼식을 올렸는데, 결혼식을 터부시 하던 우리가 오히려 남들보다 더 유난스럽게 이 모든 걸 했다는 생각을 하면 참 모순적이기 그지없다.
우리의 첫 번째 결혼식은 사실 예식이 있었던 결혼식은 아니었다.
2017년 가을, 종로구청에 가서 단둘이 혼인신고를 하고 인스타그램에 포스팅으로 결혼 소식을 알렸다. 참 우리답다 라는 반응과 함께 섭섭함을 표하는 친구들과 지인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우리는 남들은 안중에 없었다. 종로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남편과 손을 잡고 걸어 다닌 그날의 광화문 거리를 오늘도 생생히 기억한다. 인파 가득해서 평소라면 짜증이 나고도 남았을 만 한데, 이 날은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들도 노랫소리처럼 들렸고 아스파트 도로도 꽃길로 보였다. 부모님이 들으시면 섭섭해 하실 수도 있으나, 이 날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혼인신고 당일 우리는 할 일이 많았다. 우선 미리 한 달 전에 예약해 두었던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외국인은 한국에서 혼신 신고 때 미혼 서류 증명서를 자국 대사관에서 받아 제출해야 한다. 약속시간까지 별로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조마조마해하며 대사관으로 향했다. 혹시나 오늘 미혼 증명 서류를 못 받으면 우리가 계획한 오늘의 이벤트는 모두 끝이었다. 둘 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터라 어렵게 휴가를 받아 시간을 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모든 것은 오늘 완료되어야 했다.
대사관 앞의 줄은 길고도 길었다. 나는 초조하게 멀리서 남편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제발 문제 없이 들어가게 해주세요. 다행히도 머지막히 남편이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 웃는 얼굴로 남편이 손을 흔들며 문을 나왔다. 남편의 웃음을 보니 모든 게 문제없이 진행된 모양이었다. 일단 가장 불안했던 미국 대사관에서의 첫 관문은 통과했기에 우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페덱스에 가서 미리 번역해 두었던 번역 서류를 포함한 필요한 모든 서류를 인쇄하고 빠진 서류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근처 번역 공증소에 공증을 받으러 갔다. 마지막으로 종로구청에 들어가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각자를 배우자로 인정한다는 혼인신고서에 사인을 했다. 창구직원이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쓱쓱 행정을 처리하자 우리는 그렇게 정식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미리 웨딩 밴드도 맞췄는데 미국의 젊은 층에서 벌써 예전부터 소셜미디어를 시작으로 급 유행하고 있는 실리콘 재질로 만들어진 반지였다. 직업상 금속 반지를 자주 낄 수 없는 사람들 (예를 들면, 소방관이나 운동선수 등) ,고급 반지를 살 여유가 안 되는 사람들, 거추장스럽고 겉치레가 싫은 젊은 세대 등 다양한 니즈의 고객층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브랜드였다. 디자인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40미달러 정도인 매우 리즈너블 한 가격이며, 원하면 커스터마이즈로 반지에 문구도 새길 수 있다.
이 반지를 발견하게 된 것은 기막힌 우연이였는데 좀 특별한 것을 찾고 있었던 때에, 미국에 출장을 가게 되었고 일정을 끝내고 숙소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우연히 들어간 샵에 이 끝내주는 실리콘 반지가 진열되어 있는게 아닌가!이거다 바로 확신하고, 바로 인터넷에 접속하여 직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귀국하여 남편과 상의하여 바로 주문하였다. 우리는 종로구청 앞에서 이 실리콘 반지를 손에 끼고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셀피를 찍었는데, 정말 누가 보면 없어 보인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에서 서로에게 눈이 먼 Lovebirds였다.
그렇다. 이제 우린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인정한 부부이다! 형식적인 문서가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나를 복잡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훅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린 혼인신고를 하기 전까지 서로를 피앙세(혼약자)라고 불렀지만, 와이프와 피앙세의 차이는 사실 크다. 특히, 피앙세 개념이 약한 한국에선 피앙세를 남자친구 정도로 인정해 주는데, 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도 몇 번 있다. 예를 들자면, 남편의 지인들을 길에서 만났을 때, 나를 “제 피앙세예요"라고 소개 했을 때, 상대방은 대부분, "아.. 네..(건성으로)....."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거나, 별다른 관심 없이 '뭐 어디서 잠깐 만나는 스치는 여자친구겠지'라는 얼굴로 쓱 눈을 흘기고 마는게 대부분 이였다. 외국의 친구들에게 "This is my fiance" 라고 나를 소개 했을 때의 상대방의 반응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또 다른 예로,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정식 입사 전 3개월의 수습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남편의 시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우리는 급하게 미국에 가야 했다. 우린 정식적으로 결혼식과 혼인신고만 하지 않았지, 서로를 피앙세로 부르고 곧 결혼을 할 마음으로 같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남편은 공식적으로 남편이라 지칭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남편이 가장 힘들 때 내가 옆에 없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게 단지 잠깐 스쳐지나가는 연인이 아니라는 것은 부모님도 주변 친한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 사회가 그걸 인정해 주지는 않았다.
나는 직속 상사에게 이 특별한 상황에 '혼약자이자 어머니이자, 미래의 시어머니가 되었을 뻔한 분의 미국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며칠 휴가를 받고 싶다' 라고 양해를 구했고, 이해심 많았던 상사는 다행히 흔쾌히 이를 승인해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는데, 장례식에 다녀온 후 얼마 안 되어 나는 반 강제적 사내 이동을 해야 했다. 이유는 나중에 그 이해심 많았던 직속 상사에게 에둘러 들었는데, 위에서 나를 안 좋게 생각해서였다고 했다. 뭐 다른 이런저런 이유들도 있었지만, 사실 강제 좌천된 가장 큰 이유는 '(꼴랑) 남자 친구의 시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미국까지 갔다 온 사실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정말 그 당시 남편과 결혼을 했었고, 나의 "시어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온다고 했었다면, 이런 일 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억울했지만 어찌하겠나. 나는 결혼식을 못한다면 혼인신고라도 먼저 해야겠다고 사실 이때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종로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한 날은 남편의 생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진짜 태어난 날은 아니고, 고아원에 버려졌을 때 혹은 입양을 가기 전에 임의로 받은 생일이다. 대략 아이의 크기를 짐작하여 이 정도면 몇 개월 정도 된 아이겠네 하고 누군가 대략 계산을 했을 것이다. 남편은 82년 9월 말이 생일인데 어렸을 때는 1년 1년 차이가 큰 것을 감안했을 때, 대략 이르면 82년 초~늦으면 83년 초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리가 이날을 중요한 첫 번째 결혼 날짜로 선택한 것은 남편의 생일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만나는 동안 진담 반 농담 반 본인의 생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정말 실제 태어난 생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에게 있어 생일은 세상 행복한 날, 내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라고 이 나이가 되도록 의심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생일은 별 의미 있는 날이었다. 이 세상에 온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어림잡아 정해준 날이었다. 지금은 남편의 생일과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겹쳐버렸지만, 결혼기념일이던 생일이던, 무엇보다 당신이 이 세상에 와서 특별하다고 느끼는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