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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li Jun 30. 2021

경건한 골목길의 경건한 가게

가이엔마에 | 外苑前

코로나 시국으로 일본에 못 가게 되니 일본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자꾸만 더 생각난다.

호화스러운 음식이 아닌, 잔잔하고 밋밋한 간의 소박한 한 끼가 왠지 더 그립다.

오래전 일본에서 다니던 직장이 있던 가이엔마에(外苑前)는 한적한 오후 같은 동네였다.

도쿄의 부촌인 아오야마 일대의 긴자선이 홀로 지나는 인적 드문 역. 화려한 옆동네인 오모테산도와

롯폰기와 가깝게 접해 있으면서도 자신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매일 아침 가이엔마에 역 출구로 나와

회사까지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주택가를 보며 상상을 해보곤 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좋겠네.

이렇게 한적하고 예쁜 동네에 살면서도 맘만 먹으면 걸어서도 화려한 명품거리에도 나갈 수 있을 테니.

아기자기 예쁜 카페도, 레스토랑도 널려있고 심지어 편의점도 내추럴 로손(*일반 로손이 아닌, 건강식과 유기농 제품들도 구비한 프리미엄 버전의 로손)이 들어와 있다.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만

내가 직장을 다니던 그 시절의 거리를 떠올려 본다.


가이엔마에 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지금은 폐점한 「sign」이라는 그 당시에는 매우 힙했던 이탈리안 가게가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 가성비 좋은 런치세트를 먹으로 자주 갔었던 곳이다. 「sign」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패밀리마트가 있는데, 아침을 먹고 집을 나오지 못한 날엔 꼭 들르는 곳이었다. 이쿠라가 들어간 오니기리와 참치 샌드위치를 자주 사 먹곤 했다. 패밀리마트 앞 메인도로를 쭉 따라 올라가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그 좁은 골목을 들어서면 나는 안도와 함께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곤 했다.


'나도 이제 도쿄 커리어 우먼이라고. 여기까지 왔다고!! 잘하고 있어.'


꿈꿔왔던 도쿄 생활. 지리적으로 도쿄에서 거리가 좀 있는 카나가와현에서 대학을 다니느라 도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던 지난날들. 그러나 자신 있게 이제 난 도쿄 사람 아니 도쿄 커리어 우먼이라고 말할 순간이 온 것이다. 일본에서 대학 4년을 마치고 사회초년생이 된 나에게 이 거리를 걷는 나 자신이 너무나 뿌듯하고 대견해 마음이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경건한 골목길'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출퇴근 시간에 '경건한 골목길'을 걸을 때는 자신감이 넘쳐 조금은 과한 워킹으로 그 좁은 거리를 활보했다. 매일매일 같은 시간대에 이 거리를 지나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높은 굽에 명품 숄더백을 한쪽에 메고 화려한 파마머리를 한 40대 정도의 여성이 기억난다.

' 저 멋있는 여자는 어디서 일할까? ' 생각하는 도중에 나는 회사 근처에서 길을 꺾는다. 그래서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매일 아침, 오래된 고급 세단을 타고 출근하는 50대 정도의 중년도 있었다. 어떻게 차에 있는 사람을 기억하냐고. 매일 아침 자신의 차 앞에서 서성이는 출근길의 보행자에게 한치의 아량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차가 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보행자가 막는다? 이내 "빵!" 짧고 강한 경적을 울려댔다.

'참 참을성 없는 인간이네.'

욕하면서도 경적소리를 듣기 싫어 좁은 골목의 가장자리에 최대한 붙어 걸었다.


'경건한 골목길' 들어서면 양옆으로 미용실이 있다. 호기심 많은 나는  곳다 방문해보았다. 한쪽은 기가 막히게 헤드스파를 하는 곳이다. 조금  가면 왼쪽으로 고급 천연석을 파는 비즈 가게가 있었는데, 한동안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비즈 가게에서 천연석을 사와 주얼리를 만드는  유행했다. 나도 유행에 뒤쳐질라 점심시간  동료들과 가게에 가서 잔뜩 비즈를  오곤 했다. 조금  올라가 내추럴 로손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area」라는 세련된 인테리어 숍도 기억이 난다. 손바닥만  원룸에 사는 주제에 5인용 이상 고급 카우치를 파는 이곳에 들어가 고객이  것처럼 행세하며 구경한 적도   있다. 가끔 신진 작가들의 전시회도 열렸는데 마침  좋게 그곳에서 전시를 열고 있었던 Fujiyoshi Brothers(후지요시 브라더스) 형제 작가들과 직접 만날 수도 있었다. 후지요시 브라더스는 화려한 색채로 동물들을 주로 그리는데,  색감에 매료되어 팬이 되었다. 작가들에게 공작새 작품이 있다면 사겠다고 대담하게 말했지만, 내심 작품 가격이 걱정되어 차라리 작품이 없기를 바랐다.  작품은 결국  샀지만, 훗날 퇴사할  동료가 후지요시 브라더스의 그림이 살짝 들어간 컵을 선물해 주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다.


가이엔마에의 '경건한 골목길'에는 맛집 런치 가게들이 즐비했다.

300엔짜리 가성비 트럭 도시락부터, 각종 이탈리안 가성비 런치세트, 두부요리와 치킨 난반 전문점, 요일별로 찾아오는 푸드트럭의 타코 라이스와 타이음식 그리고 내추럴 로손에서 발로 골라도 맛있는 파스타 등등...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나고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가게가 하나 있는데, 「아오야마 산장」이라는 곳이다. 간판 없는 작은 가게에 문을 밀고 들어가면 정적이 흐른다. 건강식을 테마로 한 가게 안은 따뜻하고 차분한 느낌이 든다. 생수가 나오는 적은 없다. 늘 보리차 같은 구수한 차가 구비되어 있다. 작은 가게를 가로지르는 우드 슬랩이 있고, 주방이 훤히 모인다. 주인장 홀로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런치만 하고 문을 닫는다.  메뉴는 A/B/C 세 가지가 전부. 데일리로 바뀌는 그날의 A. 플레이트 메뉴와 B. 덮밥 메뉴 C. 카레가 있는데 가격대는 600엔~700엔 정도이다. 간이 심심한 건강식이다. 음식이 차분하고 심심하지만 위안을 느끼게 해 주었다. 누군가가 정성껏 차려준 소박한 한 끼의 느낌. 몸과 마음이 경건해지고 정화되는 느낌이다.  

대부분 찾아오는 손님들은 혼자이거나 삼삼오오 몰려와도 왠지 모를 정적에 수다를 떨지 못하고 조용해진다. 들리는 소리는,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주방장인 오너가 음식을 그릇에 담으며 주문받은 음식을 조용하게 복창하는 소리 정도이다.



한국에 돌아와 차분함을 많이 잃은 것 같다. 작고 소박한 것에 감사해했던 젊은 날의 사회초년생인 자신이

사라진 듯 오래인 듯하다.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지고, 밋밋한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게 돼버린 것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오늘의 행복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매일 대면하며 경건해지는 시간이 언제였던가.

소박하고 밋밋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차분한 한 끼. 힘든 타지 생활에서 위안을 달랬던 점심 한 끼.


오늘은 '경건한 골목'과 '경건한 가게'가 무척이나 그립다.


[아오야마 산장] 사진만으로도 차분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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