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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Nov 02. 2021

퇴근길

나의 고향은 다른 곳이지만, 어느덧 서울살이를 한 지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서울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 된 느낌이다. 지금은 오히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더 안심되고 익숙하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서울의 한 지역에서 거의 지내왔는데, 심지어 직장도 같은 지역 안에 있는 곳에 다니고 있다. 좀처럼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지금은 일을 하면서 구석구석을 더 자주 돌아다니고, 업무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서 이곳의 길이나 위치에 훤하다. 그런데 대학생 때보다 오히려 집에만 콕 틀어박혀 주로 지내게 되면서, 걷기와는 자연스레 멀어지고, 가까운 거리도 버스나 차를 타곤 했다. 그래서 하루에 걷는 양이 지하철 역에서 사무실까지, 지하철 역 앞에 있는 집까지,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나갈 때를 합해도 거의 한 시간도 안 되는 걷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운동도 전혀 하지 않는 나의 몸은 심각 수준으로 노화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며 툭하면 편두통이 생겨 집에 기어가다시피 돌아와 약을 먹고, 소화불량에 시달리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잠들고 다음날 출근하는 무표정한 일상의 연속.


오늘도 눈이 빠져라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퇴근길을 한번 걸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저 다음 지하철역까지만 걸어갈 심산이었는데, 내 몸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한시간을 걸어서 집까지 와버렸다. 강아지들이 왜 산책에 그렇게 열광을 해대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내 몸은 늘 걷고 싶어 했는지, 사무실을 나올 때는 그렇게 무겁던 몸이 걸을수록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는 몰랐던, 생기 있는 도시의 저녁을 느껴볼 수 있었다. 평소에 나는 지하철에서 늘 지치고 찌든 사람들의 얼굴 속에 묻혀서 더욱 피곤함을 느끼며,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역 계단도 올라가기가 버거울 정도로 항상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 웬걸, 도로를 걷기 시작하자 온몸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길거리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저녁 특유의 신선한 공기와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살맛 나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도 풍경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걸음에 맞춰지는 나의 호흡이 마음에 들었다. 몸과 머리가 일치되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곳은 대학생과 직장인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도 오래된 동네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거리의 모습도 다채롭다. 형형색색의 간판들과 구불구불한 골목길, 줄줄이 이어지는 차로 가득한 고가도로 속에서 뭔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내가 알던 동네라 길을 다 알고 가니 편하고 여유롭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거리는 저녁을 먹으러 나오는 학생들, 아직 닫지 않은 야채가게에 장 보러 나온 아주머니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아가씨, 운동하는 가족들, 퇴근길에 설레는 직장인들로 가득했고, 모두들 나쁘지 않은 청명한 가을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만족감이었다. 이 느낌을 한동안 잊고 살았었는데, 단지 길을 걷는 것 하나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오랜만에 걷다 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고, 내 기억 속에 있었던 색과 향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어, 모든 장소에서 추억이 떠올랐다.


얼마 되지 않은  같은데,  동네에는 어느새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대학 입학식으로 처음  동네를 알게 됐을   느낌,  자취방, 단골 슈퍼와 세탁소,  데이트를 했던 맥주집,  키스를 했던 골목길, 자주 시켜먹던 치킨집, 조별과제하던 카페,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오게 됐을  반가움, 불평하며 점검 다니던 가게들, 도서관,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지나고 보니 무엇 하나도 나에게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순간  옆에 었던 모든 사람의 얼굴들떠올랐다. 세월이 지난 만큼 지금은 사라진 가게들도 있었고, 지금도 굳건히  자리에서 나의 추억을 지켜주고 있는 가게도 있었다. 허름했던 집들이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선 곳도 있었고, 예전보다 낡아 바랜 곳들도 있었다. 일하면서부터는  동네가 너무나 지겹고, 언제 이곳을 떠나  쾌적한 곳으로   있을지만 생각했었는데,  순간 나는 이곳에 정이 많이 들어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엔 소중한 나의 과거들이 알알이 박혀있는 곳이었다. 나의 고민과 슬픔, 행복과 감동이 동시에 스민 곳이라는 생각에, 애틋했다.


오랜만에 걷는 게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 산책은 바쁜 하루 중 사유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홀로 걸으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천천히 바뀌면서 생각과 고민들을 조금 정리할 수 있었다. 저녁 퇴근길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걸으니 뭔가 동지애도 생기고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이제는 나를 위해 종종 걸으면서 게을러진 몸과 지친 마음을 돌볼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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