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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채 Feb 26. 2024

방을 가져본 적 없는 나에게 집이 생겼다.

마음속 글을 줍줍해 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2017년이었나 보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났던 일본 북해도의 니세코라는 지역이다.

카페 창가에 앉았는데 그 앞에 앉은 내 딸아이의 모습이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때 생각했었다. 항상 네가 앉아있는 풍경이 그림 같았으면 좋겠다고......




살면서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나다.

자그마치 40년이다.

사업 실패로 고향인 서울을 떠난 아버지를 따라 우리는 그렇게 지방 도시들을 돌아다녔다.

고향을 떠난 후로 우리 가족 모두 얼마나 고생고생을 했는지 오랜 힘듦을 지나서 겨우 자리 잡고 먹고살만하다 싶었는데……


당시 고작 몇 천만 원에 팔고 온 상계주공 8단지가 아빠가 평생 번 돈보다 훨씬 많이 올랐다지.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오아시스를 찾아 떠돌고 나니 그곳이 천국이었다 싶은 느낌이랄까.






40살이 되어 내 집마련을 하게 되었다.

하얀 타일을 옵션으로 선택했다. 나는 청소에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으며 관리도 할 줄 모르지만 이유는 하나였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에 우연히 들른 친척집 바닥이 그랬다.

당시에 내 눈에는 그 집이, 그 아파트가 우주 최강으로 좋아 보였고 부자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하얀 타일이 깔린 거실이 갖고 싶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시공사에서 알리는 없지만 아무튼 국산 타일로 30만 원에 나는 어릴 적 서러움이 조금이나마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사전점검 하러 들른 날,

나는 그 타일에 오열할 뻔했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그냥 집이 생기는 것보다 나는 그 하얀 타일에 가슴이 미어졌다.




30만원의 행복



우리 삼 남매는 여닫이 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방 두 칸짜리 좁은 월세방에 1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았다.

우리가 20대 중반이 넘어서고부터 아버지가 제대로 자리 잡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 고통의 시간은 꽤나 길었다. 각자 방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책상 놓을 곳이 없어 늘 바닥에 엎드려서 공부를 해야 했고 그 덕에 굽은 어깨와 축농증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밑에 파스 발라가며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나는 장학금도 받고 대학을 갔었다.



한참 후에 부모님이 아파트를 마련하셨어도 내 방은 없었다.

3칸짜리 방에 부모님, 남동생, 그리고 우리 자매 둘이서 썼으니......

그래도 우리 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혼자 자본 적이 없는 나는 지금도 여전히 혼자 잠을 못 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도 수면 독립을 안 한 우리 아이들 덕분에(?) 잘 잘 수 있다 싶기도 하다.




남편을 만나고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

집이 생겼고, 나의 굽었던 어깨는 활짝 펴졌다.

취미로 발레까지 한다고 하니 부잣집 마나님으로 사는 기분도 든다.


아직 이사 전이라 대출도 알아봐야 하고 지금 사는 전셋집 들어올 사람도 구해야 하고 와중에 준비하고 있는 시험도 있어 멘털이 나갈 지경이지만 늘 그랬듯 새로운 변화 앞에서 겪어내야 할 고통은 겸허히 맞이하자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새 집에도 여전히 내 방은 없다.

남편이랑 진담으로 드레스룸에 시스템장 몇 개 빼고 컴퓨터 책상을 놓아보자고 얘기하는 중이긴 한데

아마 안방을 내가 차지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도 든다.



새 집 사진을 다시금 열어보며 더 이상 하얀 타일에 슬퍼하지 말라고 어릴 적 나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래도 참 부지런히 살았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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