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실로 나를 사랑했던가
내 인생에 등장한 빌런들 중 최고 악역을 맡은 몇 명의 인물들이 있다. 참 희한하게도 그 인물들은 너무나도 닮아있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지위를 갖고 있다는 점이 우선 그러했고,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무지하게 곪아있는 사람들이라는 게 그 두 번째이다.
그들은 지독하게도 나를 갈구했다.
'고생은 행복으로 가기 위해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도대체 누구 입에서부터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도망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그 후에 남은 건 좋게 포장해 '경험'이라 불렸고, 사실은 피폐해진 마음이 더 크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내게 '착하다'라는 말과 '좋은 사람'이라는 포장지를 씌워줬었다.
그 포장지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입으면 안 되는 옷을 입은 것 같아 어쩌면 나는 그 포장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더욱 노력했는지 모르겠다.
주어진 일은 기를 쓰고 완수했고, 불안한 상황이 생길수록 나를 더 옥죄어오는 그들을 보며 어떻게든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려고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렇게 해낸 모든 일의 결과는 좋았다.
하지만 나는 능력자라기보다는 '말 잘 듣고 똑똑하고 착한 애'로 남게 되었을 뿐이라는 슬픈 결말이다.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우리는 그걸 '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자의든 타의든 그 곁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최후의 복수를 했다.
'있을 때나 잘하지'라는 말 조차 해주기 아까웠다. 아니, 역겨웠다.
처음에는 불편함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나의 문제인가 싶은 적도 있었다. 조금 선을 넘었을 때 'stop'을 외치지 않았기에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존댓말을 당연히 써야 하는 예법이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매너를 지키지 않는 그들에게 내가 불쾌하다는 걸 일일이 말로 설명하고 타협해 나가야 한다는 자체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실 웬만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추구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것이 과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나는 조금의 인내도 허락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불편함을 드러내고 거절하기를 시작했었다.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빌런들은 그게 거절인지를 모르더라는 게 핵심이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려면 에너지를 내어 싸워야 했다.
"거. 절. 합. 니. 다!"라는 말을 귓가에 대고 명확히 얘기해야 한다는 그 말이다.
피곤했다.
더욱이 그들은 내가 그래도 다시 돌아와 착한 사람 역할을 해줄 거라 믿었는지 지독히 매달렸다.
나이 40살쯤 되니 과거의 일처럼 그런 일이 없나 싶었는데 오늘 문득 비슷한 캐릭터의 무한등장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사람을 좋아하고, 성선설을 믿었던 어리석은 내 탓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제공하는 친절함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는 사람을 구분하는 눈이 내게 없었다는 반성의 생각을 잠시 하면서 그동안 나는 나를 사랑하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면서 그 안에 '스스로를 지켜야 함'은 많이 놓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내가 다치지 않는 것만큼이나 에너지를 써서 싸워야 하는 일도 나를 지켜내는 데에 있어서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싸우고 싶지 않으니 자꾸만 불편해하다가 결국은 갈등해야 되는 상황이 끌려왔던 것은 아닌지......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걸 좋아하는 만큼 마주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읽는 것에도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쉽게 이입되기도 하고 도와주려 할 때도 많고......
그러다 보면 정작 내가 나를 놓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는데 여전히 꼭 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나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구나 싶다.
얼마 전 가수 이효리 씨가 국민대에서 축사를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인생은 독고다이' 제목의 영상이었는데, 사실 나는 그 말보다도 '어차피 부모 말도, 친구 말도 안 들을 여러분'이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나 역시 내가 살고자 최선을 다했던 것이고, 그들 역시 본인이 살고자 나를 잡아당겼을 것이다.
결국은 각자의 생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인생은 독고다이라는 말이 때로는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질 순 있겠지만, 그 말을 인지하고 있으면 오히려 내가 나를 지키는 일에는 좀 더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나를 지키는 일은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