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노트르담』 빅토르 위고
난 위고의 책이 읽기 힘들다. 몇 년 전 다섯 권짜리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워낙 방대한 서사였고 묘사도 너무도 자세해서 뒤로 갈수록 의무감에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있다. 지금 읽는 『파리의 노트르담』 역시 쉽지 않다.
글의 앞부분에 노트르담 성당에 관한 묘사가 좀 길다 싶더니 그 뒤에 나오는 15세기 파리 전경은 도무지 머리에 그려지지는 않았다. 설명이 장황해서 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되었다. 그 장 마무리에 시테섬과 학교, 도심으로 나누어진다는 짤막한 정리가 더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성당, 요새 등 건축물과 인물의 옷차림, 먹거리에 대한 삽화가 첨가되어 15세기 문화 안내서 역할은 톡톡히 한다. 내가 유럽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며 잘 읽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왔던 노트르담의 꼽추가 어여쁜 집시 아가씨 에스메랄다를 위해 온몸을 바쳐 지켜내려 애쓰는 모습이 절절했다. 그런데 에스메랄다는 스물이 채 되지 않았고, 카지모도가 스무 살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클로드 프롤로 신부는 이제 갓 마흔이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인물들은 엄청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혼돈이 왔다.
프롤로 부주교는 청빈하게 살고 종교에 몸과 마음을 바친 듯 보이지만, 에스메랄다에 대한 연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도 어쩌지 못했나 보다. 주교는 에스메랄다가 사랑하는 푀부스를 질투에 눈이 멀어 칼로 찌르고, 오히려 에스메랄다에게 뒤집어씌운다. 반성하는 흔적조차 없고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한다. 자신은 잊어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죽일 수밖에 없다고 에스메랄다를 협박한다.
푀부스는 그야말로 난봉꾼 바람둥이다. 약혼자가 있으면서도 에스메랄다를 육체적으로 취하려 한다. 에스메랄다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니까, 결혼은 중요치 않다고 얼버무린다. 프롤로에게 다친 상처가 아물자마자, 아무렇지 않은 듯 약혼자에게 돌아가 버린다. 에스메랄다의 교수형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에스메랄다와 관계된 사실이 약혼자와 그 가족에게 들통날까 봐 조마조마해한다.
카지모도는 겉모습만 흉할 뿐 성자였다. 에스메랄다를 사랑하지만 스스로 물러선다. 오히려 사랑하는 이가 바라보는 이(푀부스)를 데려오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마음이 떠났다. 마음을 준 적이 없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을 데려다 키워준 프롤로 신부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에스메랄다를 해치려는 것을 알고는 괴로워한다. 결국 에스메랄다가 교수형 당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프롤로 신부를 노트르담 성당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끝까지 버티던 프롤로 부주교의 모습이 하나도 안타깝지 않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그 흉악한 마음이 너무 밉다.
에스메랄다는 알고 보니 집시가 아니었다. 귀일 수녀라 불리는 여자는 자신의 아이를 집시들이 데려갔다며 집시들을 저주한다. 그녀는 제대로 먹지도 않고 추운 곳에 홀로 갇혀 지낸다. 그녀는 에스메랄다와 징표를 확인하고서 딸을 살리려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도 딸을 보고 죽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걸까?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전형적이다. 프롤로 주교나 푀부스 같은 사람은 끝까지 악인이고, 카지모도처럼 선한 사람은 역시 끝까지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 거리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등장하는 그랑 구아르만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는 거지 소굴에서 에스메랄다 덕분에 죽음을 면하지만, 그녀를 위해 자신을 던지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자신은 혼자 도망간다.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보통 사람이다.
힘들다는 말을 수없이 내뱉으며 이 작품을 읽었지만, 읽고 나니 당시 프랑스 사회가 조금은 이해되고 그네들의 삶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따분한 역사책보다 훌륭한 소설 한 권이 더 낫다는 말이 있나 보다. 위고는 중세를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중세의 건축물에 대한 사랑은 커 보였다. 그가 묘사한 파리 시내와 건축물 묘사를 보면 그 마음의 크기가 짐작된다.
위고는 말했다. ‘인쇄술의 발명은 건축을 무너뜨릴 거라고.’ 중세까지는 건축이 그저 문화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었지만, 인쇄술 때문에 문자에 밀려날 거라고 했다.
위고의 말이 맞은 걸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일까? 여기저기 이정표를 세운다고 하늘 끝 모르게 높이 높이 올라가지만 그걸 문명의 잣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행객들은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가?’ 보다는 성당이니 궁전이니 하는 예전의 건축물을 보러 다니는 게 더 큰 목적일 때가 많다. 위고의 말대로, 고대와 중세의 건축물이 보여주고 알려주는 게 많은가 보다.
위고는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양식이 덧붙여지는 모습이 흉하다고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장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위고의 말도 이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오고 있다. 사물끼리 연결이 되는 시대. 아직 감이 잘 오지는 않지만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이 살아가기 편리해지도록 만든 것들에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닐까? 문자보다 더 무서운 바벨탑이 세워지는 건 아닐까? 내 걱정이 기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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