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장편소설
이번 주에 소개해 드릴 책은 2023년 연말에 읽은 책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입니다. 그동안 꽤나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어떻게 이제야 이런 작가를 만났을까'라는 자책을 했습니다. 그리곤 바로 '이제라도 만났으니 정말 감사하다'라고 도서관에 여러 번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2023년 북구도서관 한 책 읽기' 도서라며 늘 도서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한동안 인기를 끌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짝퉁인가 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며칠 전 도서관에 갔을 때, 여전히 초록색 표지로 된 책들이 빼곡히 도서관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왠지 자꾸 눈길이 갔다. 올해의 책이라니 해가 가기 전에 한 번 읽어보는 게 도서관 애용자로서 해야 할 '의무 아닌 의무'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망설이다 다른 책과 함께 빌리기로 했다. 사서는 이 책만큼은 반납할 때도 꼭 기계가 아니라 사서한테 직접 가져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집에 와서 첫 장을 열었다. 시작부터 무언가 둔탁한 것으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첫 페이지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서…. 도대체 어떤 해방 이야기길래 이렇게 강렬할까 더 궁금했다.
인부 서넛이 흰 국화 장식을 들고 조문실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고른 이십만 원짜리였다. 내가 백만 원짜리를 선택하자 어머니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땡이, 비싼 꽃으로 처바르먼 뭐 할 것이냐.”
사회주의자답게 유물론적인 결론을 내린 뒤 나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기어이 제일 싼 장식을 골랐다.
17쪽
화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빨치산이었다. 그 많은 죽음을 뒤로하고 용케 살아남았다. 감옥에도 다녀왔지만 두 분 다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도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이었다. 평생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이야기를 하든 감시하는 사람이 따라붙어, 사람처럼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신의 지조 있는 삶이 가능했던 건 화자의 말대로 그곳이 전남 구례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이의 사상은 싫지만, 동조할 수도 없지만, 사람만큼은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서늘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노려보더니 나지막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 혼자 잘 묵고 잘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그날 이후 어머니는 두번 다시 보증빚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61쪽
그렇지만 21세기에도 색깔론으로 왈가왈부하는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자로 신념을 지키며 사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연좌제라는 끔찍한 죄목으로 딸은 물론 조카들까지 출세는커녕 사회에 발을 내딛는 데도 발목이 잡히는 일이 허다했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동생(삼촌)과도 거의 인연을 끊고 살다시피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 그 면면을 보아온 주변 사람들은 점차 그를 따른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그 딸은 궁둥이를 붙일 시간도 없이 조문온 사람들을 맞는다. 그동안 경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자처해서 상주가 돼주어, 아버지 가는 길이 그 어떤 때보다도 따스해 보였다. 많이도 고통스럽게 사셨으니, 해방감이 더 클지도 모른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애도 아니고 맨날 싸우면서 왜 놀아요?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
47쪽
딸은 거부할 수 없이 자기도 모르게 체득된 아버지 어머니의 삶이 매우 버거웠을 것이다. 부모의 이력 때문에 결혼도 엎어졌다. 하지만 강하게 살아남는 유전자를 물려받았던가 보다. 씩씩하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누가 뭐라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지만 상주가 되어 차근차근 일 처리를 한다. 문득 어린 시절 자신을 너무도 아껴주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자신의 전부이던 아버지가, 아주 밉기도 했던 아버지가 이제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더는 목소리도 얼굴도 볼 수가 없다. 운다. 오래도록 운다. 그러고 나서 잘 보내 드린다.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 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
201쪽
너무 일찍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떠올라 읽는 내내 몹시 힘들었다. 아니 부러웠다. 나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한 손으로 꼽을 만큼도 되지 않았기에, 단단한 아버지의 등도 어깨도 기억할 수 없어서, 그와는 다른 마음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정지아의 글은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너무도 담담히 풀어낸다. 그이의 말대로 한 편의 찐한 블랙코미디를 본 것 같다. 내 아픔도 그이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조금씩 녹아내린다. 아직도 얼어있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덕분에 많이 편해졌다. 글은 이렇게 좋다. 따로 또 같은 여러 삶을 보면서 많이 위로받는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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