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말복이 지나도 처서가 다가오지만 여름은 여전히 맹렬히 불타오른다. 이번 주도 추리소설로 무더위를 조금이라도 말려보려고 계획했지만, 광복절을 대하는 무례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난 봄에 눈물을 삼키며 읽었던 김훈의 『하얼빈』을 읽었던 마음을 나누기로 했다.
『하얼빈』 김훈 문학동네
『하얼빈』은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를 스승으로 모시는 대한제국의 열두 살 황태자 이은과, 상해에서 국권회복운동에 실패하고 돌아온 대한제국의 청년 스물일곱 살 안중근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나라를 이끌어가야 하는 황태자는 일본에 감읍하고, 일개 포수인 안중근은 울분에 차 있다. 안중근은 상해에서 국권회복운동이 잘 안 되자 돌아와 뮈텔 주교의 힘을 얻어 대학을 세우고자 하지만 거절당한다. 주교는 교회의 세를 넓히는 데만 관심이 있다. 전 세계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교회는 정치에서 멀다고 한다.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이 치욕스럽고 억울한 현실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안중근은 이토를 척결하고자 마음먹는다.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길을 살핀다. 이토가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 장관과 회담한다는 소식을 듣고 결행하기로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전에 함께했던 우덕순을 만나 함께 하기로 한다. 가타부타 다른 말은 필요 없다. 그렇게 포수와 담배 팔이는 의기투합한다.
안중근의 길은 장엄하지도 공포스럽지도 않다. 안중근은 그저 하루하루 자신이 하려는 목표에 다가갈 뿐이다. 그리고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이토를 쏘기로 한다. 총신의 울림과 마음속의 떨림이 교차하지 않도록 차분하게 자신을 다잡아 스스로 정한 임무를 다할 뿐이다. 안중근은 도망가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기에 도망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코레아 후라(한국 만세)
안중근의 쓰러지면서 총을 떨어뜨렸다. 탄창 안에 쏘지 못한 한 발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의 몸을 무릎으로 눌렀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철도 가에서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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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의 가슴에 명중했다는 느낌에 안도하기보다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이토에게 말해 줄 수 없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안중근은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자신이 행한 일의 원인과 결과를 검찰관에게 말한다. 무식한 조선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른 범죄로 만들려는 계획은 성사될 수 없었다.
안중근은 ’사형'이 확정되었음을 알고 가족과 집안의 일은 동생 정근에게 맡긴다. 자신의 일대기를 부지런히 쓴다.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자 한다. 하루하루 열심히도 산다.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하얼빈에 묻고 독립이 되면 조국으로 옮겨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일제는 교포사회에서 벌어질 일들을 두려워해 시체도 내어주지 않는다.
안중근은 동양 평화를 위해 이토를 쏘았다고 했다. 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일제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 조선을 중국을 러시아를 침탈한다고 한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일본의 발치에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일본의 ’ 영웅‘으로 많은 것을 누렸다. 심지어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은 자신의 은혜로운 스승의 죽음을 너무도 안타까워했다. 그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몰랐다는 게 이유가 될까? 그는 열두 살이었고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다. 안중근은 조선의 ’ 영웅‘이어야 하는데 조국은 그를 외면했다. 100년이 다 되어서야 그의 유해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아낼 수 없었다.
지난해 <영웅>이라는 뮤지컬 영화를 봤다.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은 하얼빈과 흡사하다. 영상을 보는 내내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영웅의 죽음 자체도 안타까웠지만,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더 많이 울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었지만,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얼빈』에서 김훈은 안중근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토로하지 않는다. 그저 안중근의 길을 따라갈 따름이다. 안중근은 영웅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절대 악으로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길에는 꾹꾹 눌러 담은 김훈의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김훈의 글은 짧지만, 들이쉰 숨을 쉽게 내뱉기 어렵다. 그 메마른 문장에 담긴 울림이 커서 꺼이꺼이 울곤 한다. 『칼의 노래』>에서도 『남한산성』에서도 그랬다. 『하얼빈』에서는 괜찮을 줄 알았다. 내가 단단해진 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교수대에 올라가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에서 가슴이 미어져 터지는 줄 알았다.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작가의 말’을 읽었다. 안중근의 동생들은 독립운동에 매진했는데, 안중근의 자식들은 이토의 제단에 머리 숙이고 사과를 했다. 일본 측에서 꾸민 일이라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부인 김아려는 단단해 보였다. 그래서 그의 자식들도 단단한 줄 알았다. 너무 큰 비극이다. 김구의 말대로 막냇동생 안공근이 안중근의 가족을 챙겼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자신의 아버지 기일에 이토를 죽인 일에 대해 사죄하는 안중근의 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강력하게 말하지 못하고, 실수라면서 외교문서에 독도는 우리 땅 밖에 있다는 해괴한 문서를 만드는 지금의 모습은 20세기 초반 일제 강점기의 대한제국 황실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 걸까. 광복절 아침에 대한 민국 대표 방송국 KBS는 기미가요가 들어간 오페라를 틀어넣고 실수라 한다. 의사들과 열사들, 이름 모를 모든 이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역사는 우리의 행동을 기록하기 위해 읽는 것”
-체 게바라
정치와 종교의 끈끈한 야합. 종교는 우리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덕순이 쏘아 맞혔다 해도 안중근이 우덕순으로 바뀔 뿐 그 의미가 사라지거나 작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큰일이었다. 안중근은 우직한 우덕순이 있어서, 단단한 아내가 있어서, 믿음직한 동생들이 있어서, 굳건한 어머니가 있어서 또 거사 자금을 강탈할 이석산이 있어서, 조도선과 유동하라는 조력자가 있어서 거사를 감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단순히 2차 대전이 끝나서가 아니라, 이런 수많은 필부 필녀들의 피땀으로 조선의 독립은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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