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다정하고 애교 많은 아들과의 일화를 이야기를 하면, 여기서 꼭 초를 치는 사람이 있다.
“마음 준비 단단히 해 놔야겠네.”
“나중에 서운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지금이 좋을 때다~ 많이 즐겨요~”
불과 20년 전만 해도 ‘아들이 최고’라며 아들 없는 엄마들을 그렇게 타박하더니만, 시대가 바뀌어도 그 대상이 ‘아들 없는 엄마’에서 ‘딸 없는 엄마’로 바뀌었을 뿐 한국 사람들의 오지랖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내 아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아들이니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며 일어나지도 않은 나의 미래를 걱정해 준다. 참 고마운 일이다.
오늘날, 남아보다 여아를 선호하는 현상은 과거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의 지위가 계속해서 낮은 것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딸을 선호하는 이유가 바야흐로 '여성 상위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딸을 원하는 이유가 ‘딸이 더 키우기 쉬워서’, ‘딸이 있어야 엄마가 좋기 때문에’, ‘나중에 아플 때 딸이 있어야 하니까’라는 것이라면 당신의 딸이 부모를 위한, 즉 ‘부모의 힘듦을 알아주고 도와주는 존재’로 키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은 그저 자식일 뿐이다. 자식은나와 독립된 존재이고, 내가 바라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 ‘살가운 딸’, ‘친구 같은 딸’, ‘(나에게) 소용 있는 딸’이 되어 줄 거라는 부모의 암묵적인 기대가 자라나는 딸들에게 불필요한 책임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딸 셋에 아들 하나인 집에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아들을 간절히 원하셨고, 그만큼 아들을 귀하게 여기며 키우셨다.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죄. 부모님이 우리를 아들과 차별할 때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자랐다. 그 죄책감은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이어져, 우리는 하나뿐인 귀한 아들보다 부모를 더 생각하는 딸이 되었다. 나는 이 역설적인 심리를 <K-daughter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K-daughter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지금의 딸들이 아들보다 더 살뜰히 부모를 챙기고, 부모를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미래의 딸들도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자. 과거, K-daughter의 죄책감이 책임감으로 이어졌듯, 오늘날 그런 기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느끼는 책임감 또한 죄책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전히 이 시대는 여성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돌봄 노동을 강요하던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며, 대한민국의 딸들에게 마음의 짊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딸들이 ‘가족을 위한 삶’ 보다 ‘스스로를 위한 삶’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았으면 좋겠다.
아들이든 딸이든,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아이들의 가치는 부모의 '소용'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고유하며, 그 존재만으로도 귀하고 또 귀하다.우리에게 와 준 소중한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때,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의 역할을 당당히 해 나가는 것. 부모로서 바람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숙한 어른으로서 우리의 행복은 ‘자식과의 관계’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찾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