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가다 보면 수진리고개, 모란고개, 태평고개 등 다양한 이름의 고개가 나온다. 성남시청과 모란시장 사이에 있는 모란고개 꼭대기에 우리 외갓집이 있었다. 원래 외갓집은 수돗가와 화장실이 밖에 있는 단층집이었다. 내가 열 살이 되던 1989년, 분당에는 신도시가 들어서고 있었다. 외삼촌도 시대에 맞춰 옛날 집을 허물고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다세대 주택을 올렸다. 1980년대는 화장실이 옥외에 있는 구식 주택이 신식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던 시기였다. 외갓집이 있던 좁고 긴 골목에도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다세대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그래서 나는 외갓집에 갈 때마다 어느 대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헛갈리곤 했다.
골목길 입구에서 하나, 둘, 셋. 세 번째 푸른색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새하얀 콘크리트 계단을 서너 개 올라가면 새시로 된 1층 현관문이 있었다. 현관을 열면 바로 앞에 마루와 부엌이 보였는데, 할머니는 항상 그 어딘가 즈음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계셨다.
외갓집에는 외할머니와 큰 외삼촌 부부, 외사촌 언니 오빠들이 살았다. 외삼촌 부부는 슬하에 자녀 넷을 두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이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조카들 셋까지 모두 일곱을 키워야 했다. 셋째 외숙모가 오랫동안 앓아서 그 남매가 외갓집에 와 있는 날이 많았고, 시어머니 구박과 신랑의 외도에 시달리다 바보가 되어 돌아온 불쌍한 큰 이모와 그 어린 딸도 외갓집의 군식구였다. 할머니는 허리가 다 꼬부라지고 손가락 끝이 다 갈라져도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산나물을 캤고 장날이 되면 모란장에 내다 팔았다. 군식구가 많은 탓에 한 푼이라도 벌어보고자 하신 일이었다.
방학이 되면, 철없던 언니와 나는 엄마에게 외갓집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외갓집에 가면 우리가 좋아하는 은진 언니(셋째 외삼촌 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들은 나보다 두 학년 위였다. 외갓집에서 우리 셋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은근하고 조용하게 말썽을 부리곤 했다.
지하에 있는 방 2개는 언니 오빠들이 나누어 쓰고 있었는데, 언니 오빠들이 출근하고 나면 지하실은 우리 차지였다. 언니들 방에는 시와 함께 그림을 그려 넣은 이상한 액자들이 벽에 걸려 있었고,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우리는 언니들 방에 가면 주로 화장놀이를 했다. 언니들에게 들킬까 봐 살살 만졌음에도 화장품은 늘 엉망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아이섀도와 립스틱을 본 미선 언니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지만, 성질 고약한 미숙 언니는 소리를 지르곤 했다. 미숙 언니는 무서웠다.
오빠들은 언니들에 비해 관대했다. 그래서 우린 오빠들 방에서 많이 놀았는데, 그곳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물의 보물창고]였다. 오빠들 방의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틀면 감미로운 팝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외갓집에서 난생처음 팝송을 들었다. 우리는 [추억의 팝]이라고 제목이 붙여진 카세트테이프 속의 노래들 중 모리스 앨버트의 <Feelings>를 가장 좋아했다. 테이프를 앞으로 돌려 그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워~워~워~ 피일링~~워~워~워~피일 유~~” 이 부분은 꼭 따라 불렀다. 왜냐하면, 가사가 제일 쉬웠으니까.
어느 날은 오빠들 방에서 책을 한 권 발견했는데, 그 책은 실로 어마어마한 책이었다. 우리는 좁은 싱글 침대에 셋이 바짝 붙어 엎드린 채, 숨을 죽이고 한쪽씩 한쪽씩 번갈아 가며 낭독했다. 반 지하 방 창문으로 사람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칠 때면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우린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저 한 템포 쉬어갈 뿐. 그 책은 나의 첫 포르노그래피였다.
미선 언니가 예쁘게 차려 입고 외출을 하면, 우리는 언니 뒤를 몰래 따라갔다. 언니가 따라오지 말라고 자꾸만 이야기해도 우리는 절대 말을 듣지 않았다. “언니, 어디 가?”, “언니, 누구 만나러 가?”, “언니, 우리도 데려가면 안 돼?”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며 성남시청이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졸졸졸 따라갔다. 언니가 아이스크림 사 먹으라고 용돈을 쥐여 주면, 그제야 우린 “언니, 잘 갔다 와~~”라며 얄밉게 배웅을 하곤 했다.
외갓집에는 빨간 기와로 테두리를 두른 작은 옥상이 있었다. 보이는 것은 죄다 비슷비슷한 다세대 주택뿐이었지만 우린 옥상을 좋아했다. 옥상에 있던 커다란 빨간 다라를 옆으로 눕혀 놓고 한 명이 들어가서 누우면, 나머지 두 사람이 열심히 다라를 굴렸다. 수동으로 돌아가는 다람쥐통이었다. 달이 밝은 여름밤이면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말도 안 되는 귀신 이야기를 지어내며 시시덕거렸다. 옥상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피워 외숙모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외갓집에서 보내는 우리의 즐거운 방학생활은 언니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끝이 났다. 사춘기가 된 언니들의 감정이 묘하게 얽히면서 사이가 점점 멀어졌고, 언니는 더 이상 방학을 보내기 위해 외갓집에 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나도 외갓집에 가지 않게 되었다.
우리 큰 외숙모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다. 시동생의 자식을 셋이나 거두어서 키우셨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모시고 사셨다. 그 많은 군식구들도 싫은 소리 한번 없이 모두 거두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세 명의 조카들이 장성해 떠났을 때, 외숙모는 막내딸인 미선 언니 손을 잡고 “인자 우리 식구만 남었네...”라는 말씀을 독백처럼 하셨다고 한다.
막내 미선 언니도 시집을 가고, 10년 전쯤 큰 외삼촌이 돌아가시자 외숙모는 혼자가 되셨다. 외숙모는 평생 동안 살아온 외갓집을 팔아 어려운 자식들에게 나눠 주시고 방 한 칸짜리 단출 한 집으로 이사를 하셨다. 평생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다가, 혼자 계시게 되니 홀가분하면서도 적적하셨을 것 같다. 작년에 큰 외숙모도 혈액암으로 돌아가셨다. 코로나 한창일 때라 제대로 조문도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우리 외갓집이 있던 동네는 현재 성남시 수진동 제1재개발지구에 속해 있다. 지어진지 30년도 넘은 늙고 나이 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 동네는 재개발이 시작되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외숙모처럼, 내 추억 속의 외갓집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사람도.. 집도...기억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빛이 바래고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니, 행복했고 좋았던 옛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깝고 짠한 마음이 든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언니들을 만나야겠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만 한다. 우리 기억 속에 존재하는 소중한 사람들은, 우리가 추억을 공유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생생하게 살아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