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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존스 Jun 25. 2021

감나무는 아직도 청춘!

감나무 이야기

  친정에 감나무가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마당이 있는 넓은 집을 상상하곤 하는데, 사실 우리 친정에는 마당이 없다. 밖에서 보면 얼핏 마당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유는, 손바닥만 한 좁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도 튼실하게 가지를 넓힌 감나무들 덕분이다.

  1984년, 지금의 집을 지으면서 아버지는 담벼락과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사이에 감나무를 심으셨고, 그로부터 37년 동안 감나무는 해마다 800개에서 1000개 가까이 되는 감을 키워냈다.

  봄이 되면 감나무 가지에서 꽃봉오리처럼 예쁜 새순이 나온다. 언제 감잎이 저렇게 컸나 싶어 깜짝 놀랄 때 즈음, 감잎 아래 살포시 노란 감꽃이 숨어있다. 꽃이 지면, 꽃받침은 단단한 감꼭지가 되고, 꽃이 피었던 자리에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둥글고 단단한 아기 열매가 맺힌다.

  6월이 되면 감나무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꼭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떨궈낸다. 더 실하고 맛난 열매를 맺기 위해 약하고 부족한 것들을 떨구어 내는 용기를 낸다.

  여름이 되면 감나무는 넓은 잎을 펼쳐 골목길을 다 채울 만큼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살아남은 아기 열매들은 뜨거운 여름 햇볕과 함께 쑥쑥 자란다.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감들이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10월. 엄마는 우리 사 남매에게 전화를 걸어 날을 비워두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고작 두 그루밖에 안 되는데도 "감 따기"는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고된 노동이다.

  드디어 감 따는 날! 친정에 모인 가족들은 각자 역할을 정해 흩어진다. 힘이 좋은 남자들은 제일 긴 장대와 사다리를 이용해 골목에서 감을 따고, 여자들은 짧은 장대를 들고 2층 베란다나 옥상으로 올라가 감을 딴다. 땅에 떨어져 두세 개로 쪼개진 감을 줍거나, 이리저리 널브러진 감잎을 쓸어 모으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감을 딸 때는 양파망 같은 주머니가 달린 장대를 이용하는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힘보다는 요령이 중요하다. 한 놈을 정해 눈도장을 찍고, 그놈과 눈을 맞추며 장대를 쭈욱 뻗는다. 그물망 안에 감이 들어오면,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잽싸게 장대를 180도 비튼다. 이때 '툭' 하고 가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난 뒤 조용하다면 감이 그물망 안쪽으로 떨어졌다는 뜻이고, 연이어 '후드드득 푹, 퍽!'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면 이미 그 감은 한쪽 얼굴을 뭉갠 채 땅바닥에 철퍼덕하고 나자빠져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따는 감은 대부분 설익은 감이지만, 간혹 나무에 매달린 채로 완전히 익은 매끈한 홍시가 있다. 운 좋게 그런 감을 터트리지 않고 따게 되면,  손바닥 위에 보기 좋게 올리고 인증샷부터 한 장 찍는다. 그다음 그놈을 반으로 쫙 갈라 한 입 가득 베어 먹는다. 입가와 손가락 사이에는 끈적한 주황색 과즙이 흘러내리고, 달콤하고 탱탱한 감의 속살은 목구멍 깊은 곳까지 부드럽게 흐른다. 감을 따다가 만나게 되는 홍시는 유난히 달고 선명하다.

  "감 따기"를 마치면, 이제 곶감을 만들 차례이다. 이때도 역시 분업이다. 두 사람은 감자칼로 감 껍질을 벗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두꺼운 이불 바늘에 굵은 면실을 꾀어 감꼭지에 단단히 묶는다. 꼭지가 떨어진 감은 몸통에 실을 통과시켜 묶는데, 감의 속살을 통과한 실이 미끌거려 매듭 지을 때 은근히 애를 먹는다. 재간둥이 남동생은 옥상에 빨랫줄을 치고, 여남은 개씩 묶어 놓은 감을 요령껏 보기 좋게 걸친다.

  1층 부엌에서 삼겹살을 굽는 냄새가 옥상까지 솔솔 올라오면, 이제 일이 거진 끝나간다는 이야기이다. 친정에서 배부르게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꾼들의 손에는 감 보따리가 하나씩 들려있다. 집에 돌아와 신문을 깐 박스에 설익은 감을 나란히 펼쳐 놓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하나둘씩 말랑한 홍시가 되어 간다. 물컹한 순서대로 골라 먹다 질릴 때쯤이면, 옥상에 널어 둔 곶감을 걷어다가 먹는다. 따다가 깨진 감들은 감식초를 담궈 2년 동안 묵힌 후에 약으로 먹는다.

  겨울이 다가오면 감나무는 그 많고 풍성하던 잎을 모두 떨구고, 길고 추운 겨울을 준비한다. 감나무의 한해살이가 그렇게 지나간다.


  옛말에 이르길, 감나무에는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했다. 잎이 넓어 글공부를 할 수 있으니 문(文)이요, 목재가 단단해 화살촉을 만드니 무(武)이다. 겉과 속이 한결같으니 충(忠)이요, 치아가 없는 노인도 즐겨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니 효(孝)이고, 서리를 이기고 오래도록 매달려 있는 나무이니 절(節)이라 하였다. 옛 선인의 문무충효절(文武忠孝節)을 모두 갖추고 있는 나무라니! 감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인심 좋은 우리 집 감나무 덕에, 이녁 식구뿐만 아니라 주변 이웃과 친척들까지 도시에서 난 특별한 대봉시를 맛볼 수가 있다. 나도 가끔은 모양이 탐스럽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감을 골라 고마운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감을 딸 때마다 '나이 많은 감나무가 감을 키우느라 고생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알아보니 감나무의 평균 수명은 200에서 250년이라고 한다. 아이고, 감은 아직 청춘인데 사람만 늙었구나. 사람이 늙으니 감나무 뒤치다꺼리가 점점 힘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댕강 베어버릴 일이 아니다. 오덕을 갖춘 우리 감나무, 애지중지 잘 키워 대대손손 벗하고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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