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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존스 Jun 25. 2021

내 어린 시절, 당신이 있어서 참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 갔다오면 엄마는 늘 집에 계셨다. 그 것이 엄마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의 기준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과, 끼니 때마다 차려진 밥상. 일 하지 않는 엄마.    

  엄마는 결혼하기 전에 아빠에게 "결혼하면 절대로 나가서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전포고 하듯 말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처녀 때 공부를 곧 잘 하는 외삼촌의 학비를 대기 위해 미싱사로 일을 하셨다. 그 일이 무척 고되었는지 결혼을 하면 절대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셨나보다.

  아빠는 시골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자랐다. 아빠가 생각하는 좋은 부모란, 끼니 때마다 배 곯지 않는 것과 이리저리 이사 다니지 않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내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아빠는 부지런히 일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셨고, 우리집 냉장고에는 제철을 맞은 싱싱한 과일들이 항상 있었다. 이런 부모님 덕분에 언제나 엄마가 차려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돈 때문에 마음 졸이며 걱정하는 일도 없었다.

  부모님은 부모님 방식대로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고, 잘 키우고자 노력하셨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봤을 때 좋은 기억보다 아프고 서러웠던 기억들이 더 많이 난다. 그 이유는 내가 정서적으로 매우 예민한 아이였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엄마는 감정 조절이 힘든 사람이었고, 자식들에게 본인의 화를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한 없이 좋다가도, 어느 날은 별 것 아닌 일로 야단을 쳤다. 엄마는 끓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 할 때면, 훈육을 핑계로 사정 없이 때리고 입에 못 담을 욕을 퍼부어대곤 했다. 소심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던 나는 필연적으로 엄마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좋았고 행복했던 일보다, 억울하고 상처 받았던 일을 더 많이 기억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고 울적해 지는 걸 보면 말이다.

  어린 시절을 자꾸만 자꾸만 들여다보았더니,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한 없이 다정했고 따뜻했던 사람인데, 그는 나의 이야기 속에 왜 이리 늦게 찾아 온 것일까.

  그 사람은 바로 우리 막내 삼촌이다. 9남매의 맞이인 아빠와 막내 삼촌은 거의 스무살 차이가 난다.  아빠는 엄마랑 결혼을 하고 시골에 있던 삼촌과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는 어린 시동생과 병 걸린 시아버지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엄마 앞에 나타났을 때 엄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가뜩이나 어려운 신혼 살림에, 열 몇살짜리 시동생을 한쪽에 눕히고 사는 것은 엄마에게 큰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풍에 걸려 몸이 불편한 시아버지까지 부양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천떡꾸러기가 된 어린 삼촌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하고 불편했을까.. 생각해본다.

  큰 딸인 언니가 태어났을 때 삼촌은 12살이었다. 2년 뒤에 둘째 딸인 내가 태어났다. 우리가 울면 업어주고, 오줌을 싸면 기저귀를 갈아주고,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할 땐 우리를 데리고 나가서 한참을 놀아주는 것. 그것이 삼촌의 일과였다. 삼촌은 유난히 눈동자가 까맣고, 오목조목 얼굴이 예뻤던 나를 귀여워했다. 그 때 나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유달리 삼촌을 좋아하고 따랐던 걸 보면 삼촌에게 사랑 받았던 기억들이 내 안에 남아 있었나 보다.

  우리 아빠는 군것질에 돈 쓰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다. 어릴 때 어렵게 살아서 군것질이나 외식은 쓸데없이 돈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바로 집 앞에 슈퍼마켓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빠에게 혼날까봐 과자나 사탕을 마음대로 사 먹을 수가 없었다. 과자를 먹고 싶어하는 조카들을 위해 삼촌은 가끔 비밀 과자파티를 열어 주곤 했다. 우리집에는 창문을 열면, 창문 만큼의 너비에 앞으로 30센치 정도 돌출 된 공간이 있었고 그 바깥 쪽으로 창이 하나 더 있었다. 삼촌은 그 공간에 우리가 좋아할 만한 과자나 사탕 등 군것질 거리를 사서 숨겨 놓았다가, 엄마 아빠 몰래 우리를 불러 나눠 주곤 했다. 삼촌방에서 몰래 과자를 나눠 먹던 기억도 나에겐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우리 집에는 장난감도 별로 없었다. 나는 인형을 참 좋아했는데 엄마는 그 흔한 마론인형도 사주지 않으셨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언니의 친구 중에 인형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집(?) 언니가 있었다. 언니가 그 친구집에 놀러 갈 때면, 나는 어떻게든지 껴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언니들이 선심 쓰듯 나를 데려가 주면, 나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하녀' 아니면 '악녀'였다.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날 삼촌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었다. 나와 언니는 당연히 마론인형이였다. 가슴을 졸이며 엄청나게 기대했건만, 삼촌이 사가지고 온 선물은 완전히 나를 실망시켰다. 언니에게는 마론인형을 사주었는데, 나에게는 양배추머리 인형을 사주었기 때문이다. 삼촌 눈에는 아직도 내가 애기로 보였나보다. 너무 너무 서러워 방안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닫힌 문에 기대어 양배추머리 인형을 끌어안고 울었다. 내가 계속 우니까 삼촌은 당황했고, 언니는 크게 선심을 써서 "인형을 바꿔줄까?" 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양배추머리를 안고 우는 동안, 못생기고 통통한 양배추머리에게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 인형은 다정한 친구 같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삼촌의 마음이 담긴 그 인형은 나에게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삼촌은 크리스마스나 생일 같은 날을 챙겨주기도 했지만, 특히 우리의 입학식과 졸업식을 살뜰히 챙겼다. 아마도 삼촌에게 본인의 입학식과 졸업식이 많이 외로웠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일 때문에 직접 보러 오진 못하더라도 직장으로 우리를 불러서 옷을 한 벌씩 사주시곤 했다. 당시에는 경향식당이 유행했는데, 특별한 날 부모님들이 자녀를 데리고 가서 외식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음식 가격이 비싸기도 했지만, 외식을 못하게 했던 아빠 때문에 우리집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 드라마에서 경향식당이 나올 때 그 이야기거리에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것 또한 삼촌이 나를 경향식당에 데려가 준 덕분이다. 삼촌이 이렇게 나를 불러서 옷을 사주고, 밥을 사줄 때면 순수하게 기뻐하는 마음보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삼촌에 대한 글을 써야지, 생각을 하고 오래간 만에 삼촌에게 안부를 물었다. 어린 시절에 좋은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문을 여니, 삼촌 또한 어린 시절에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는 대답을 한다. 삼촌이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삼촌의 삶이 외롭고 고되었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삼촌, 곰곰히 생각해 봐, 어린 시절에 행복했던 기억, 따뜻했던 기억. 그런 작은 기억 하나가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데.."

 "나는, 학교 갔다 와서 너희들 본 기억 밖에 없지.. 너는 눈동자가 유난히 까맸지, 얼굴도 예뻤어.."

 "귀여웠겠네~~ 그리고 내가 삼촌 많이 좋아했잖아. 아이들이 주는 사랑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데.. 삼촌 그 때 힘들었어도 좋은 기억이네."

  나는 삼촌에게 억지로 좋은 기억을 만들어 준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가끔 삼촌에게 서운해 한다. 삼촌의 성격이 냉정하고 쌀쌀 맞다고 이야기한다. 신혼 때부터 자기가 데리고 살았는데, 자라서 엄마에게 살갑게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엄마 앞에서는 말을 아낀다. '엄마가 고생한 것도 사실이지만, 엄마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삼촌에게 상처를 준 것도 사실일 거야. 엄마는 너그럽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엄마 자식인 나 조차도 엄마가 불편하니까.'

  지금 생각하면 삼촌은 언니와 나를 아꼈던 만큼, 우리에게 유년기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사실, 받은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을 나누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힘들다. 어색하고 불현하다. 분명 삼촌도 그러했을텐데 삼촌은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삼촌의 세 자녀도 사랑으로 다독여가며 키웠다.

  삼촌이 예뻐하던 눈이 까만 아이는 40대 아줌마가 되었고, 서로 먹고 사는게 바쁘다보니 삼촌을 만난지도 꽤 오래 되었다. 핸드폰을 늘 끼고 살면서도 전화 한 통을 못하고 산다. 하지만 삼촌과 나는 '애뜻한 기억'으로 연결 되어 있다. 삼촌에게는 언니와 나를 업어 키웠던 중학교 시절의 기억이 있고, 나에게는 삼촌과 함께 보낸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린 그 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있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때로는 행복한 모습으로, 때로는 쓸쓸한 모습으로, 때로는 다정한 모습으로 슬그머니 찾아와 우리를 따뜻하게 위로할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삼촌이 있어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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