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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존스 Jul 01. 2021

그들만의 런웨이(run way)

로드싸이클 다이어리

 로드 싸이클을 처음 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옷이 너무 비싸서, 헬멧이 너무 비싸서, 고글이 너무 비싸서, 장갑이 너무 비싸서, 심지어 양말까지 너어무 비싸서 깜짝 놀랐다. 자전거만 비싼 것이 아니라, 자전거에 딸린, 구색을 갖춰야 할 모든 것들이 다 너무 비쌌다.

  처음엔 자전거만 사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다 부자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뭐, 부자까진 아니더라도 나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임엔 분명했다. 모두들 기함급 자전거에 빠까뻔쩍한 장비를 장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막 입문한 나에게 자전거 옷과 용품을 구색 갖춰 산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윗도리 한벌이 애들 한 달 학원비보다 비쌌다. 그래서 자전거를 살 때 껴붙이로 구입한 헬멧과 사은품으로 받은 장갑을 끼고, 고글 대신 선글라스를, 스포츠 양말 대신 알록달록한 아동용 양말을 신었다. 엉덩이 패드가 달린 속바지 위에 레깅스를 껴 입었고, 뒷주머니가 있는 자전거용 상의는 중고로 구했다. 전형적인 늅늅이의 모습이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동호회에 나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양을 보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올해 입문한 걸 뻔히 들 알고 있는데,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유행이 2~3년은 지난 옷들이었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론 '중고로 샀구나'라고 생각하겠지 싶어 자존심이 상했다.

  누군가가 새 헬멧이나 고글, 새 옷을 입고 나타나면 다들 귀신 같이 알아채고는 한 마디씩 했다.


"어! 헬멧 샀네? 어디꺼지? 잘 어울리네. 얼마 주고 샀어? 이게 이번에 새로 나온 거지? 나도 한번 써 봐도 돼?" 등등

  만약에 누군가가 기변이라도 하게 되면, 그날은 정말 난리가 나는 날이다. 남자들은 특히 기변에 대한 욕심이 컸다. 입으로는 "자전거가 중요한 게 아니야, 엔진이 중요한 거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입문급 자전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전거 산지 한 달도 안돼, 유럽의 이클 선수나 탈 법한 자전거로 바꾸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름 비싸게 주고 구입한 내 자전거는, 다른 사람들의 자전거에 비하면 반의 반값 수준이었다.

  어느 새인가, 나도 그들만의 문화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 돈이 없어 새 것을 사진 못했지만, 중고장터에 잠복해 요즘 핫하다는 브랜드의 옷이나 고글, 헬멧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물건이 올라오면 다른 사람에게 팔릴까 봐 전전긍긍해가며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사들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게 차려 입고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아줌마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로드 여신"이 되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전거를 자주 못 탔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나도 부자처럼 보일까?'라는 생각. 그건 진짜 아닌데.

  내가 촌빨 날리던 때, 비싸기로 유명한 파노말에서 위아래 50만원이 넘는 옷을 현금으로 척척 사는 친구가 있었다. 같은 가정주부인 그 애가 돈 쓰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집이 잘 사나? 남편이 돈을 엄청 잘 버나 봐,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부자도 아니었고 오히려 마음이 불행한 사람이었다.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 때문에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쇼핑을 하며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던 것이다.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 나는 왜 그리 겉모습에 집착을 했을까. 멋져 보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고. 그런 마음은 당연한 거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코로나 이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제는 돈이 있어도 자전거를 구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하고, 자전거 옷가게는 남는 재고가 없어 세일도 하지 않는다. 그만큼 기함급 자전거에 고급 의류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겠지.

  한편으로는, '자전거 인구가 늘어난 만큼 남의 시선 신경 안 쓰고 순수하게 운동으로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나도 이제 <그들만의 런웨이>에서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화려한 겉모습도, 업힐을 얼마나 잘 타는지도, 얼마나 평속을 빨리 내는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그 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즐기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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