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빌 언덕이 없는 곳

#_05

by 살짝미친 바나나
나는 조금씩 무언가를 잃기도 했고,
또 조금은 얻어가기도 했다.

집에서 나와

비빌 언덕이 없는 것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좋은 모양이라는 게 뭔지 몰랐지만,
그땐,

그렇게 나는 하나씩 만들어져 갔나 보다.


참 이상한 곳이었다.


밖에선 누구였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디에 살았는지, 그런 건 아무도 묻지 않았다.

머리는 다 똑같이 밀렸고,
입는 옷도, 신는 운동화도, 식판 위에 놓인 반찬도
모두 같았다.


5화 누구도 나를 평가하지 않았다.png


누구에게도 기대받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평가하지 않았다.


처음엔 불안했는데,
그게 조금은 편했다.

처음부터 맨몸으로 시작하는 느낌.


내가 뭘 했든, 뭘 못했든,
이 안에서는 다 소용없는 일들이니까.


그게 이상하게 나를 위로했다.

군대는 공평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말이 안 되는 공간이었다.


전공이 컴퓨터공학이면 행정병,
기계공학이면 보일러병,
시골 출신이면 예초병이란다.

만약 횟집 아들이었으면 해군으로 배치될 기세다.


그만큼이나 단순함이 법칙이 되는 곳,
그곳이 군대였다.


그런 대로 버틸 만했다.


답도 없고, 감동도 없고, 그렇다고 비극도 없고.
그냥 시끄럽고 덥고,
내 이름보다는 내 번호가 더 익숙해지는 생활.


다만 진짜 신기했던 건,
기호식품이 금지되고 나서

내가 기호식품을 꽤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됐다는 점이다.


과자, 초콜릿, 껌, 커피…
평소엔 쳐다도 안 보던 것들이
막상 못 먹게 되니까 이상하게 더 끌렸다.


그날도 그랬다.
종교활동으로 교회에 갔는데,
갑자기 사회자가 말했다.

"가장 열정적으로 춤춘 사람에게
자유시간 한 박스를 드립니다!"

나는 원래 조용한 편이었다.
춤 같은 건 늘 구경만 했던 쪽이었다.


그런데,
정신 차려보니
나는 의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5화 자유시간 받은 바나나.png

그리고 자유시간박스를 들고 있었다.


웃기지만,
그때 처음,
뭐 하나를 그렇게까지 갖고 싶어했던 것 같다.


훈련소는 그렇게 지나갔다.

정리하면 별 건 없는데,
그 안에 있던 날들은 꽤 조용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름을 묻지 않는 곳에서
나는 점점 나를 부르며 알아가고 있었다.


그게 괜찮았던 건지 아닌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5화 별빛아래 자기화.png


다만,
그렇게 한 달을 지나며
만들어진 모양은
어떤 모습이든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그때 만든 모양을 꺼내어 보며
가끔 미소지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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