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밤

제11화 │ 공개 낭독

by seomar

그날 오후, 윤서는 가방 한쪽에 사진과 노트 몇 장을 넣고 밖으로 나섰다.
햇살이 낮게 기울어 거리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인쇄소 골목, 우물터, 담벼락 — 그 흔적들이 지금은 그녀의 발걸음이 닿을 공간들로 바뀌었다.


“지금부터 잊힌 이름들을 부르겠습니다.”

시청 앞 광장 무대 위에서 마이크가 작게 울렸다.
윤서는 관객석 맨 뒤에 서서 무대를 바라봤다.
무대 위에는 평면 스크린이 떠 있었고, 흐릿한 흑백사진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돌아봤다.
태극기를 든 노인, 손자 손을 잡은 어머니,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는 젊은이들 —
모두 저마다의 시간을 품고 이 자리에 있었다.

사회자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이름들을 다시 부르는 시간입니다.”

그 말에 윤서의 심장이 뛰었다.
무대 위에서 조명이 꺼지고, 어두운 화면 위에 첫 이름이 떠올랐다.

“한경수.”

부조명 아래에서 할머니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윤서는 사진 속 증조부가 생전 걸었던 골목길의 바람 소리가 머릿속에 스쳤다.

다음 이름이 나왔다.
“진수.”
그리고 이어서 “순옥.”
관객석 여기저기서 가볍게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일종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사회자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병연’이라는 이름.”
그 이름이 울리자 무대 위 스크린이 흔들렸다.
겨우 보이는 글자 하나, ‘병연’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윤서는 숨을 들이쉬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윤서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의 온도에서, 침묵이 아니라 연대가 느껴졌다.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회자는 말없이 스크린을 넘겼고,
빛바랜 사진과 함께 흐릿한 메모 하나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이긴 날, 후손들이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무대 위엔 그 문장이 크게 떴다.
그리고 관객들은 잠시 숨을 멈췄다.
기쁨 속에서도 남는 여운,
이름을 부르며 마주해야 하는 책임감이었다.

무대가 끝나고 연주가 시작됐다.
손풍금의 선율이 부드럽게 퍼졌고,
사람들은 박수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서는 곱게 접힌 노트를 꺼내 무대 뒤 조명이 밝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기록합니다.”
그 한마디가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길의 선언이었다.

그날 밤, 윤서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케이블이 꼬인 무전기 상자 옆, 노트북 화면엔 오늘 무대의 영상 캡처가 떠 있었다.
사진, 이름, 메모 — 모든 것이 흐름 속에 놓여 있었고,
이제는 그녀가 그것을 써 내려가야 했다.

키보드 위 손가락이 움직였다.
“병연 — 그 이름은 여기 있습니다.”
타이핑 소리가 어둠 속에서 비밀스러운 박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금속 상자에서 아주 작고 낮은 소리가 났다.
기계가 아니라 마음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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