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밤

제9화 | 기록의 틈새

by seomar

윤서는 해가 기울어가는 무렵, 지도를 접어 가방에 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더 깊다.”
혼잣말처럼 입 밖으로 흘렀다.

밤새 머릿속을 맴돌던 지도 위의 점들—골목, 우물터, 담벼락—오늘은 그중 하나를 골랐다.
사진에 찍힌 시장 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오래된 우물터가 표시된 곳이었다.


우물터 앞에 도착했을 땐, 해는 이미 반쯤 지평선 아래로 숨었다.
돌로 만든 우물목은 바람과 시간에 닳아 있었다.
노란 실크 같은 담쟁이덩굴이 벽돌 틈새를 타고 내려왔고, 그 아래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윤서는 숨을 고르며 지도를 꺼냈다.
“여기가 맞나…”
그녀는 사진 속 배경에서 본 벽돌무늬와 닮은 돌담을 찾아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 순간, 담 벽 틈새에 글자가 살짝 새겨져 있다는 걸 보았다.
‘병연’이라고 읽힌 듯했지만, 잉크도, 페인트도 아닌 오래된 흙자국 같았다.

그 글자 앞에서 윤서는 멈춰 섰다.
시간이 흘러 사라질 뻔한 흔적이, 아주 조용히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빛이 꺼진 자리, 이름이 사라졌다.”
그 말이 새겨졌다.

윤서는 손가락으로 흙자국을 살짝 만졌다.
“정말… 네가 여기 있었던 거니, 병연…”
조용히 중얼거렸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쁨을 향해 내딛던 발걸음이, 이제는 흔적 없는 사람을 향해 걷고 있었다.
기록이라는 건, 단지 ‘기억한다’는 말보다 더 깊고 더 무겁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다가, 한 손이 멈춰졌다.
“이걸 남겨야 해… 하지만 어떻게 남겨야 하지?”
윤서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기록을 남긴다는 건, 그 이름을 확정짓는 일이었다.
그러나 확정할 수 없다는 건, 그 이름이 억울하게 지워질 수 있음을 뜻했다.
그 틈새, 그 불완전한 공간에서 그녀는 고민했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기록해야 해요.”
윤서는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와 다락방에 들어서자, 무전기 부품이 밤 공기에 흔들리고 있었다.
책상에 앉자마자 윤서는 노트를 펼쳤다.
지도 한 장, 사진 한 장, 담벼락의 흙자국 사진 한 장.
그리고 작은 메모 한 줄.

돌담 위의 글자, 흙 속에 숨었다.

타이핑이 시작됐다.
키보드 자판 위로, 윤서의 숨결이 묻어났다.

그 순간, 금속 상자 속에서 아주 낮고 뚜렷하게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문을 노크하는 듯했다.

윤서는 숨을 멈추고 속으로 말했다.
“지금이야. 이제 더 깊이 들어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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