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밤

제7화 │ 사라진 이름의 그림자

by seomar

하루가 저물 무렵, 윤서는 사진 한 장을 안고 빗물 맺힌 골목길을 걸었다.
낡은 시장의 자갈과 물때 낀 벽돌이, 어제 본 흑백 사진 속 거리와 겹쳐졌다.
그 골목 끝, 장기판 깔아놓은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그곳엔 어제 만났던 최 노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가게 문을 천천히 열자, 조용한 실내가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최 노인은 장기판 옆 의자에 앉아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오너구나. 사진이랑 메모 잘 챙겨 왔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긴 여운이 남았다.

윤서는 사진을 건네며 말했다.
“네. 어르신이 들려주신 이야기… 더 듣고 싶어요.”
노인은 잠시 고민하듯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좋아. 다만 이 얘긴 오래된 기억이니까, 둘 다 조심해야 한다.”
그는 책장 뒤쪽 서랍을 열고, 오래된 메모지 여러 장을 꺼냈다.

“이건 내가 오래전부터 모아둔 기록이야.
메모 모음이지, 완전한 이야기라기보단 파편들.”
그는 종이 더미를 펼치며 손가락으로 한 장을 집었다.


노인이 펼친 메모 중 한 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소란이 시작되기 직전, 그는 격문을 한 장 품고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뒤돌아보면, 골목 끝 도로에선 불빛 하나가 꺼지듯 했지.]


윤서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 불빛이란 게… 무슨 뜻일까요?”

노인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전등인가, 횃불인가, 아니면 누군가 들고 있던 등불이었을지도…
하지만 그게 꺼졌다는 건, 그의 발걸음이 어둠 속으로 흡수되었다는 뜻이지.”

윤서는 그 말을 노트북에 옮겨 적었다.
“흡수되다… 어둠 속 그림자처럼.”
그 단어가 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윤서가 다시 물었다.
“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걸까요?”

노인은 뒤척이며 대답했다.
“그 사람, 너무 빨리 사라졌고, 남은 자들은 기억하기조차 두려워했을 거야.
누군가는 잊는 게 편하고, 또 누군가는 기억하는 게 위험했겠지.”

윤서는 그 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
기록을 남긴다는 건, 잊힌 누구에게 다시 존재를 주는 일.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일.


가게를 나와 골목바닥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윤서는 손끝을 떨며 사진을 꺼내 펴보았다.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병연, 진수, 순옥…
너희 이름도 기록될 수 있게.”
그녀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어둠 속 무전기 상자 위에 노트를 펼치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잊힌 목소리가 이름을 갖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줄 한 줄을 써 내려갔다.

그날 밤, 금속 상자 어딘가에서 아주 작고 낮은 탁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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