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밤

제5화 │ 이름 없는 목소리

by seomar

정오의 광장엔 태양처럼 강렬한 빛과 울림이 가득했다.

그곳은 해방의 축복이자 상흔이 뒤섞인 공간이었다.

윤서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인파 속을 천천히 걸었다.

무대엔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가고, 사회자는 마이크 앞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었다.


무대 위 커튼이 걷히고, 사회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오늘은 단지 기념일이 아닙니다. 잊힌 이름들에게 다시 말을 걸기 위한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였다.
사회자는 준비된 낭독 대본을 펼치며 읽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광복을 맞이한 그날의 기록을 다시 꺼내봅니다.
이제는 이름으로 불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한 걸음 물러나며 숨을 고른 뒤,
“먼저, 한—경—수.”
그 이름이 울려 퍼지는 순간, 광장은 미묘한 떨림으로 가득 찼다.

할머니의 손이 떨렸다.
윤서는 그 손을 꼭 잡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사회자는 이어서 또 다른 이름을 정중히 음절로 불렀다.
“진수… 순옥…”

그러나 병연이라는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

광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낭독이 끝난 뒤, 박수와 환호가 뒤섞였다.
그러나 그 환호 속에 실린 무언의 질문이 있었다.
‘병연이의 이름은 왜?’
‘그 이름은 왜 빠졌을까?’

윤서는 무대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인파 속에서 발이 묶였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고, 휴대용 녹음기를 꺼냈다.

옆에 서 있던 한 노인이 태극기를 흔들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도 기억하자. 아직 불리지 않은 이름도 기억해야한다.”

윤서는 그 목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노트 속 이름들이 흔들렸다.


그날 밤, 윤서는 도서관 아카이브실을 다시 찾았다.
은아 씨가 책상을 치우고 있었고, 그녀는 부스스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료는 거의 백지 수준이야. 이 시대의 기록은 파편과 증언에만 기대야 해.”
은아 씨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윤서는 조용히 노트를 꺼냈다.
“여기, 낭독회에서도 병연 이름이 없었어요. 왜 빠진 걸까요?”

은아 씨는 깊게 한숨 쉬더니 말했다.
“아마도, 기록기관에서 누락되었거나 검열되었거나, 혹은 이름이 알려지면 위험이 따랐던 걸지도 몰라요.”

윤서는 속으로 뜨겁게 치밀었다.
이름 하나가 빠졌다는 건, 그 사람을 아예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온 윤서는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선 조용한 공기가 맴돌았다.

“할머니, 왜 병연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서 금기였던 거예요?”
윤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머니는 침묵했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 이름을 자꾸 부르면, 남은 이들의 마음이 얇아지는 것 같아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에게 매달리는 삶은 우리를 더 무겁게 만들었지.”

윤서는 그 말이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금기의 이름이, 그만큼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윤서는 다락방에서 무전기 상자를 꺼냈다.
손전등 빛 아래 부품들은 어제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노트를 꺼내 펼치자, 낭독회에서 빠졌던 이름이 더 선명해졌다.

[병연아… 너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너를 부르고 싶다]


윤서는 속삭였다.
키보드를 켜고, 새로운 파일을 만들었다.
제목은 단순하지만 무거웠다.

[이름 없는 목소리들을 위한 기록]


그녀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각 이름이 한 줄씩 나타났고, 비워진 자리에 병연을 먼저 적었다.
그 자리엔 질문 부호 하나, 이어지는 문장 끝엔 점 하나.

그 점 위에 손가락을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병연이의 흔적을 찾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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