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인쇄소의 밤
1945년 8월 12일, 서울.
밤은 검고, 공기는 무거웠다.
서울의 뒷골목 작은 인쇄소.
그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듯했지만, 내부에는 작은 기계음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딱—딱—”
활판 인쇄기의 손잡이가 움직일 때마다, 잉크 묻은 활자가 종이에 새겨졌다.
경수는 손끝의 감각만으로 활자를 배열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진수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건네고 있었고, 순옥은 활판을 닦고 묶음으로 정리했다.
“좀 더 진하게 찍을까? 글자가 너무 연해 보여.”
순옥이 낮게 말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눈앞에 닿을 텐데, 또렷해야지.”
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잉크를 덧칠했다.
창밖에서는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군홧발 소리도 멈춘 밤.
하지만 인쇄소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 분주한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수는 문득, 기계를 멈추고 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1시 15분.
“병연은… 오늘도 안 오네.”
경수의 입술이 떨렸다.
진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친구…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경수는 대답 대신, 인쇄기에 묻은 잉크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 손수건에는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며칠 전, 병연이 다친 채 돌아왔을 때 묻은 자국이었다.
“그날 이후로… 아무 소식이 없잖아.”
순옥도 조용히 말을 보탰다.
“혹시, 붙잡힌 건 아닐까요?”
진수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확인되지 않은 소리 말고, 확실한 것만 이야기해.
그런 소문이 퍼지면, 우리 모두 위험해져.”
경수는 말없이 벽을 바라봤다.
병연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리고—그가 떠나기 전 남긴 말이 떠올랐다.
[혹시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경수 형. 꼭… 기록해줘.]
경수는 책상 서랍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어두운 불빛 아래, 연필로 조심스레 적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2일.
병연이 사라진 지 사흘째.
나는 여전히 믿고 싶지 않다.
그는 밀정이 아니고, 도망친 것도 아니다.
그저… 늦는 것이다.]
경수는 노트의 끝장에, 오늘 인쇄된 격문의 문구도 적었다.
[광복은 눈앞에 있다.
그러나 그날이 오더라도, 그날을 만든 이름을 잊지 마라.]
그 문장에 병연, 진수, 순옥—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조용히 덧붙였다.
그때, 멀리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경수는 창문 틈을 열었다.
경찰서 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렸고, 발소리가 섞여 들렸다.
“뭔가 있나 봐.” 진수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경수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 이상은 위험해.”
경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더 찍자.”
순옥은 활판을 정리하고, 종이 묶음을 천으로 감쌌다.
그들은 하나둘 불을 끄고, 인쇄소를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경수는 라디오 뒤판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노트를 접어 넣고, 뒤판을 덮었다.
작은 나사 몇 개가 빠져 있었지만, 그는 조심스레 눌러 맞췄다.
[병연아. 네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너는 여기 남아 있어.]
경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걸음 뒤로, 인쇄소 안에는 잉크 냄새만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