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밤

제1화 │ 다락방과 유물

by seomar

윤서는 여름방학 첫날 아침,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느릿한 햇살이 마루 위 바닥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서울의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 할머니 댁 마당에 섰을 때, 한편으로는 안도와 긴장이 섞인 감정이 뒤섞였다.

학교 과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광복 80주년, 각자의 기억과 가족사 탐색’이라는 주제였다. 수업 시간엔 뻔한 자료와 인터뷰만 주로 나왔고, 윤서는 뭔가 다른 것을 좇고 싶었다. 교과서 역사와 기념비적인 이름들 사이에 묻힌 이름들을 찾아내 보는 건 어떨까.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이라는 부제가 마음속에 떠올랐고, 그것이 이 정적한 한옥의 마당을 선택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할머니 댁은 도시 외곽에 남은 오래된 한옥이었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방들이 붙어 있었고, 벽 너머엔 담벼락, 담장 너머엔 좁은 골목길이 이어졌다. 이 집엔 다락이 있었다. 하지만 다락은 집 안의 방처럼 쓰이는 공간이 아니라, 보관과 은닉을 위한 창고 수준이었다. 계단은 없었고, 입구는 낮고 좁았다. 그 문을 열려면 몸을 굽히거나 기울여야 했고,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윤서야, 다락 좀 정리 좀 해주겠니?”
부엌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거지 도구를 놓고 돌아본 할머니의 얼굴이 반쯤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왜요? 요즘은 안 쓰는 것 많잖아요.”
윤서가 묻자,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오래된 물건 중에, 네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게 있을지도 몰라.”

그 한마디에 윤서는 대답할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따가, 문간방 옆에 놓인 접이식 사다리를 끌고 다락 입구 앞에 섰다. 입구 틈새는 겨우 어른 허리 높이 정도의 공간을 허락했고, 그 너비도 어깨를 약간 비스듬히 해야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손전등을 켜고 사다리를 조심스레 밟으며 올라갔다. 나무 판자 하나하나가 삐걱대며 균형을 시험하는 듯 흔들렸다. 들어선 다락 안은 어두운 공기와 먼지로 가득했다. 고요 속에서 작은 입자들이 빛을 타고 떠다녔고, 창살 작은 틈 사이로 흐린 빛줄기가 겨우 스며들었다. 윤서는 숨을 삼켰다.

이불 더미, 헌 옷가지, 오래된 상자들이 이쪽 저쪽에 널려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더듬으며 상자를 하나씩 열어 나갔다. 먼지 묻은 사진, 낡은 보자기, 접힌 노트 몇 권. 그리고 그중 하나, 녹슨 금속 상자가 나왔다. 상자는 두 손으로 받쳐야 할 정도였고, 철판 표면엔 벗겨진 녹과 얼룩이 잔뜩 눌러붙어 있었다.

무심코 뚜껑을 조심스레 열자, 내부에 작은 기계 조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진공관, 전선, 배터리 홀더 흔적—완전한 장치는 아니었지만, 미군 무전기 부품으로 보이는 것들이었다. 상자 겉면엔 흐릿한 각인이 남아 있었다.

“Signal Corps U.S. Army”
“SCR‑536”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금속판을 어루만졌다. 전쟁 영화에서만 보던 그 이름이, 지금 자신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번쩍였다. 왜 이 유물이 이곳에 있을까. 누가 왜 숨겨두었을까.

그 뒤측 바닥 위, 상자 속 깊은 곳에서 납작한 노트 하나가 섞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꺼내 펼치자, 흐릿한 연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1945년 8월 12일. 비가 갠 오후. 종이 냄새가 유난히 매캐하다.
밤마다 글자를 인쇄하는 일이 기쁨이다. 누군가 읽을 수만 있다면, 이 밤도 견딜 수 있다.]


손끝이 떨렸다. 윤서는 더위를 잊은 채 노트장을 껴안고 읽어나갔다. 몇 장 넘기자 다음 문장이 적혀 있었다.


[병연이 오늘 돌아오지 않았다. 활판에 묻은 잉크를 닦다 말고,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
동무는 잉크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병연.’ 낯선 이름이었다. 가족사나 대화 속에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도대체 누굴까?

마지막 장을 넘기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일, 소식이 오더라도 마음을 놓지 말 것.
기쁨이 온다 해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니, 이름들을 잊지 말 것.
병연, 진수, 순옥… 우리가 이긴 날, 후손들이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윤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금속 상자 속 기계 부품들이 바닥에 묻은 먼지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아주 작지만 분명한 ‘탁’ 소리가 났다. 전원이 연결돼 있지 않았음에도, 금속 틀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윤서는 놀라 상자를 내려놓고, 노트를 꼭 쥔 채 조심히 다락을 빠져나왔다. 사다리를 내려오며 뒤를 돌아봤다. 다락 입구 너머로 흐릿한 빛만 남아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방에는 이름과 문장의 잔향이 머물렀다. 병연, 진수, 순옥 — 세 개의 이름은 이제 윤서의 내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노트북을 켜고 처음으로 제목을 떠올렸다.


'자유를 생수처럼 마실 수 있게 된 날, 누군가는 물통을 닫는다.
그러나 광장은 여전히 목마른 이름으로 가득했다.'


그 문장은 아직 빈 공간이 많았다. 윤서는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얹고, 처음으로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리고 창문 너머 어슴푸레한 밤하늘 아래, 방 안에 놓인 금속 상자 위에서 또 한 번 미약한 탁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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