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병연이라는 이름
이튿날 아침, 창밖은 잔잔한 햇살로 잠을 깨웠다.
윤서는 눈을 떴을 때도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떨리고 있었다.
어젯밤 수첩 속 문장들과 이름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병연, 진수, 순옥…”
그 이름들이 그녀의 하루를 흔들었다.
침 식탁엔 백반 반찬과 된장국이 놓여 있었다.
윤서는 밥 한 숟가락을 떠놓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혹시 옛날에 증조할아버지 쪽 친인척 중 병연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으세요?”
그 질문이 어색한 공기를 흩뜨렸다.
할머니는 젓가락을 잠시 멈추고, 눈을 멀리 둔 채 말없이 국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이름은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단다.
죽은 자나 돌아오지 못한 이의 이름을 자주 부르면, 남은 이들의 마음이 무거워지니까.”
윤서는 그 말이 더 깊게 다가왔다.
“근데 왜 그 이름이 수첩에 있어요? 왜 증조할아버지는 그런 기록을 남겼을까요?”
할머니는 말없이 얼굴을 숙였다.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일이란다.
하지만 이름이 남아 있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잊혀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윤서는 그 말을 기억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미 작은 결심 하나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 윤서는 노트북을 챙겨 학교 기록보관소로 향했다.
도서관의 복도는 한산했고, 푹신한 카펫 소리가 발소리를 부드럽게 덮었다.
기록보관소 내 큐레이터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찾고 싶습니다.”
큐레이터 은아 씨가 조용히 얼굴을 들며 인사를 건넸다.
“어떤 자료를 찾고 계신가요?”
윤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노트에 ‘병연, 진수, 순옥’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 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기록된 게 있을까요?”
은아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병연이라는 이름은… 거의 보지 못한 이름이네요. 독립운동 관련 자료는 많지만, 정식 명단에 등재되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특히 해방 직전과 직후의 혼란기엔 수많은 이름이 검증 없이 기록에서 사라졌지요.”
윤서는 노트북으로 키워드를 입력하며 말했다.
“혹시 동지 명단, 인쇄소 기록, 혹은 당시 언론 기사에도 이름이 있을지요?”
은아 씨는 책상을 파내며 지도와 옛 신문 아카이브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어떤 자료에서도 병연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진수, 순옥도요?” 윤서가 물었다.
“진수는 몇 건의 이름이 흐릿하게 나와 있긴 한데, 인물 확정이 안 돼 있고요, 순옥은 더더욱 희박하군요.”
윤서는 두통이 밀려오는 듯 눈을 감았다.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이란,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만드는 것이다.
기록보관소를 나와, 윤서는 인근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고, 수첩을 펼쳤다.
손끝으로 잉크 자국을 따라가며 머릿속을 훑었다.
그때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찾던 중, 오래된 신문 기사 스캔본 하나가 눈에 띄었다.
1945년 8월경의 지역 신문, 소규모 행사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인쇄소 동지 진수·순옥’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고, 그 밑에 괄호 속 ‘활판공’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 단서만으로도 윤서는 마음이 뛰었다.
그 순간, 창가 밖 거리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떤 노인이 허스키한 음성으로 독립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소리는 바람에 실려 교차되었고, 윤서의 귀에 어린아이처럼 울렸다.
“우리는 살아남는다…”
그 노랫말이 그녀 가슴 안에 메아리쳤다.
해 넘어갈 즈음, 윤서는 할머니 댁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음이 설레는 채로 다시 다락방 문 앞에 섰다.
사다리를 오르며 마음이 떨렸고, 다락방 안은 낮보다 더 어두웠다.
손전등을 켜고, 어젯밤 남겨둔 금속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윤서는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조심스레 종이 다발 하나가 더 걸려 있었다.
그 다발에는 옛 사진 몇 장, 작고 닳은 메모 몇 개가 함께 있었다.
사진 속엔 젊은 남자 몇 명이 담겨 있었고, 그중 하나는 증조할아버지로 보였다.
다른 이는 낯선 얼굴이었고, 사진 아래 작은 메모가 있었다.
[병연 형, 여기까지 잘 왔다. 다음은 네가 이어갈 차례.]
윤서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 메모는, 증조할아버지의 말이자 암시였다.
그날 밤, 윤서는 다락방 불빛 아래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수첩과 사진과 금속 상자를 펼치고, 손끝으로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을 더듬었다.
“증조할아버지, 병연 형, 누군가 반드시 기억하겠다고…”
그 말은 그녀의 입술에 남았고, 방 안에 울렸다.
이제 그녀는 기록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을 꺼내고, 그들을 다시 세상 위에 세우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