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해방의 낮
1945년 8월 15일, 정오.
좁은 인쇄소는 여전히 어두웠다.
햇살은 외면했고, 잉크 냄새는 밤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경수는 활판 인쇄기 앞에서 손잡이를 닦고 있었다.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찍어낸 격문이 종이 더미 위에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딱… 딱…”
인쇄기에서 마지막 잔열이 났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기계가 아닌 거리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쟁이 끝났대요!”
처음엔 누군가의 말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몇 초 뒤, **“해방이다!”**라는 함성이 골목을 타고 인쇄소 안으로 밀려들었다.
진수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순옥은 종이 묶음을 품에 안은 채 창문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울고 있어요.”
순옥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웃기도 하고… 그냥 멍하니 서 있는 사람도 있어요.
이상해요. 다들 무슨 말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경수는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활판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심장은 요동치는데, 손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경수야, 이제 됐어!”
진수가 외쳤다.
“더는 격문도, 인쇄도 필요 없어! 진짜야. 우리가 원하던 날이 왔어!”
경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야. 소문일 수도 있어. 확실한 발표가 아니잖아.”
“사람들은 다 믿고 있어.
그리고 오늘은 그 믿음이 진실보다 먼저 도착한 날이야.”
경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기쁨이라는 단어가, 너무 커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오랜 꿈이 갑자기 현실이 되면,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법이었다.
“병연 씨는… 어디 있을까요?”
순옥이 조용히 물었다.
“이런 날에… 그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환호했을 텐데.”
경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이름.
병연.
그가 없었다.
그가 가장 원하던 날에, 그가 없었다.
격문을 가장 많이 나르던 손, 가장 크게 웃던 얼굴.
그리고—마지막으로 아무 말 없이 사라진 뒷모습.
진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병연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 단순한 ‘늦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경수는 더는 인쇄소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문을 열자, 쏟아지는 소음과 열기가 그를 감쌌다.
거리에는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태극기를 흔들고, 누군가는 땅에 무릎 꿇고 울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만세!”를 외치며 뛰어다니고, 할아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나 환희 속에는 균열이 있었다.
일본 순사들이 여전히 건물 앞에 서 있었고, 일부 사람들은 일본 상점의 간판을 부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제 우리 마음대로야!”라며 소리쳤고,
다른 이들은 “그만하자!”며 뜯어말렸다.
그 장면들은 혼란과 기쁨, 분노와 안도감이 뒤엉킨 광경이었다.
경수는 사람들 사이를 헤매기 시작했다.
“병연아!”
그는 외쳤다.
그러나 함성과 울음에 묻혀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병연, 병연, 병연…
그 이름만이 경수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 병연을 찾으러 갈 것이다.
만세 소리는 멀리까지 가지만, 사람의 발은 가까운 곳에서 멈춘다.
그는 그 문장을 떠올리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날 밤, 자신이 썼던 노트의 문장.
지금 그 말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광장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리치고, 웃고,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수는 그 환희 안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병연이 없는 해방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 반드시 그를 찾아야 했다.
그가 있어야만,
이 기쁨은 진짜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