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은, 유난히 바쁘고 화려하다.
거리마다 벚꽃이 피고, 사람들은 거기서도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든다.
하지만 정우에게 봄은 언제나 조금 벅찬 계절이었다.
무언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현실.
그런 기분이 싫어서, 그는 늘 조용한 골목길을 돌았다.
그날도 그랬다.
출판사 납품 미팅을 마치고, 지하철역 입구로 걸어가던 길.
사람들 틈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정우맞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엔 여전히 햇빛 같은 눈웃음을 지닌 소녀, 아니 이제는 여자가 되어 있는 수진이 서 있었다.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왔고, 어릴 적보다 조금 더 말랐지만, 표정만큼은 그대로였다.
"혹시. 수진이?”
정우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수진은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진짜 너 맞네. 아, 이렇게 길에서 만나네?”
정우는 낯설고 반가운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나… 시간 좀 괜찮은데. 너도?”
“응. 괜찮아.”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근처 카페로 향했다.
무엇 하나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마주 앉은 자리에서 풍기는 공기엔 오래된 기억이 묻어 있었다.
“사진 계속 찍고 있냐?”
정우가 먼저 물었다.
“응. 원래는 사람 찍는 거 좋아했는데… 요즘엔 풍경도 찍고, 뭐 이것저것.
아, 전공도 사진으로 했어. 학교는 휴학 중이지만.”
“잘 어울린다. 어릴 때도 그런 거 좋아했잖아.”
“넌? 출판사 다닌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응. 뭐, 그냥 그런 출판사. 돈은 안 되는데, 일은 좋아.”
말은 간단했지만, 수진은 그 짧은 문장에서 정우의 변함없는 성격을 느꼈다.
여전히 말수는 적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는 따뜻함과 책임감이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너, 하나도 안 변했네. 말 없는 거.”
수진이 웃으며 말했다.
정우는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너는… 조금 더 말 많아진 것 같아.”
“너 때문에 그런 거야. 옛날부터 내가 다 떠들어야 했잖아.”
그 말에 둘은 동시에 웃었다.
짧고 소박한 웃음이었지만, 오랜 시간의 틈을 메우기엔 충분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종종 만났다.
평일 저녁, 주말 오후, 바쁜 일상 틈틈이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내주었다.
수진은 종로 근처에서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정우는 새로 출간할 에세이를 편집 중이었다.
어느 날, 수진은 조심스레 물었다.
“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정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별일 없이. 그냥 살았지.
그때 너랑 연락 끊긴 후로… 좀 그랬어.”
“나도. 그때는… 뭔가, 세상이 다 낯설었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외로움을 견뎠다.
수진은 카메라를 들었고, 정우는 책 속으로 숨어들었다.
정우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강직인간증후군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그 병이 아버지를 무너뜨렸고, 어머니를 떠나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엔 단순한 근육통 같았다.
그런데 점점 손이 떨리고, 무릎이 자주 꺾였다.
밤마다 몸이 뻣뻣하게 굳고, 감정 기복이 심해지면 호흡까지 가빠졌다.
의사는 말했다.
“유전적 원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생활을 조심해야 하고, 감정적 스트레스는 최대한 줄이셔야 합니다.”
정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병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특히 수진에게만은.
그녀는 웃어야 했다.
슬픔이나 병 같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 곁에 있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정우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번 뒷걸음질쳤다.
같이 있어도, 마음은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야경을 함께 보던 중,
수진이 불쑥 물었다.
“정우야, 너 요즘 좀 이상해.”
“왜?”
“가끔 멍하니 있을 때가 많고… 내가 다가가면 자꾸 물러서는 것 같아.
내가 뭐 실수했어?”
정우는 잠시 말을 잊었다.
입술이 말라가고, 가슴이 뻐근했다.
“아니야. 그냥… 네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그게 좋다, 싶어서.”
수진은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듯 들었다.
정우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은 항상 불완전했고, 그 불완전함이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밤이 깊어지고, 수진이 돌아간 뒤
정우는 한참을 병원 근처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저릿했고, 몸은 굳어갔다.
하지만 마음은 더 얼어붙고 있었다.
그는 알아차리고 있었다.
수진과 다시 가까워지는 순간,
결국은 그녀를 더 아프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그날 이후, 정우는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수진은 그걸 느꼈다.
그가 자꾸만 멀어지는 것을.
어딘가로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시선을.
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아직은 이 감정이 끝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도,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정우가 그랬던 것처럼.